사랑하는 이유

<span class="sv_wrap"><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profile.php?mb_id=H0PEY0UL0VEME" class="sv_member" title="1540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1540</a><span class="sv"><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board.php?bo_table=OOC&amp;sca=&amp;sfl=mb_id,1&amp;stx=H0PEY0UL0VEME" rel="nofollow">아이디로 검색</a></span><noscript class="sv_nojs"><span class="sv"><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board.php?bo_table=OOC&amp;sca=&amp;sfl=mb_id,1&amp;stx=H0PEY0UL0VEME" rel="nofollow">아이디로 검색</a></span></noscript></span>
2026-03-02 21:01

PRIVATE DOCUMENT

NOT FOR DISTRIBUTION / FOUND IN: DESK DRAWER, FLAT B, 7/F, HING WAH BUILDING

UNDATED. HANDWRITTEN. BLACK INK, MONTBLANC. MULTIPLE REVISION MARKS.

제목 없음. 상단에 적혀 있던 글자는 검게 지워져 있다.

(지워진 흔적 아래 겨우 읽히는 글씨: 이사영을 좋아하는 이유)

수정됨: 이사영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이유.

1.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샌드위치 가게 카운터 너머로 이 얼굴을 봤을 텐데, 흉터를 봤을 텐데,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주문을 받았다. 대니한테 물어봤다. 저 여자 원래 저래? 대니가 그랬다. 응, 원래 저래. 그게 더 무서웠다.

2. 연두색 눈.

홍콩에서 저 색깔 눈을 가진 인간을 본 적이 없다. 빛 받으면 투명해지고, 그늘에서는 짙어진다. 수조에 물 갈아줄 때 햇빛에 비치는 물색이랑 똑같다. 예쁘다. 특이하다.

3.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면서도 옆에 있다.

LDC. 이주 관리관. 쉽게 말하면 사람 쫓아내는 놈. 그걸 알면서도 MTR에서 내 옆에 앉아서 귤 까먹고 있었다. 보통은 이 직함 듣는 순간 눈이 달라진다. 이사영은 안 달라졌다. 그게 멍한 건지 용감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4. 나를 기계라고 했다.

처음 만난 날. 관성으로 움직이는 기계라고. 고장나지 말라고. 그 말이 정확했기 때문에 화가 났고, 화가 났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고, 기억에 남았기 때문에 호출기 번호를 줬다. 순서가 틀렸다는 건 안다. 그래서 더 짜증난다.

5. 54, 88.

고장나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88은 빠이빠이. 만난 첫날에 안부 인사를 호출기로 보내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나. 그 숫자들이 액정에 뜰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멈추는 것 같았다. 7458로 답신했다. 보고싶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 넣으면서 손이 떨렸다. 그 사실이 싫었다.

6. 비누 냄새.

향수가 아니다. 그냥 비누.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비누 냄새가 이사영한테서 나면 다르게 느껴진다. 담배 피우다가 바람 방향이 바뀌면 가끔 비슷한 냄새가 섞여 오는데, 그때마다 고개를 돌린다. 옆에 없는데. 병이다.

7. 재킷 안감을 수선해줬다.

검은 안감에 검은 실. 보이지 않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해진 부분을 찾아서 꿰맸다. 바느질이 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땀 한 땀이 조심스러웠다. 그걸 보고 있으니까 목 안쪽이 뻐근해졌다. 가죽 자켓을 입을 때마다 안감에 손이 간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이사영이 있다. 그게 좋다.

8. 금붕어한테 이름을 지어줬다.

3년 동안 이름 안 붙이고 키웠다. 이름을 붙이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죽었을 때 아프니까. 이사영이 수조 앞에 쪼그려 앉아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없다고 했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지어줬다. 그 순간 그 물고기는 내 물고기가 아니라 우리 물고기가 됐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겨버렸다는 걸 알았다.

9. 횡단보도에서 내 팔을 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이사영의 팔을 잡았다. 왜 잡았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그냥 저 사람이 초록불에 걸어가버리면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싫었다. 이름만 아는 사이. 내가 제안한 건데, 내가 먼저 선을 그은 건데. 왜 잡았냐고 물으면. 모른다.

10. 국수집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다. (계속)

이름만 아는 사이가 됐으니까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발이 안 떨어졌다. 국수집 간판 불빛 아래 서서 담배를 네 갑 피웠다. 사장이 나와서 쳐다봤다. 경찰 부를까 고민하는 눈이었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그냥 이사영이 안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됐다. 88이 호출기에 떴을 때 울 뻔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른한 살 먹은 남자가 골목에서 주저앉을 뻔 했다. 7458. 보고싶다. 공중전화까지 뛰어갔다.

11. 입술 위에 손을 얹었다.

내 입술에. 키스가 아니었다. 손바닥이었다. 작고 차가운 손이 내 입 위에 올라왔을 때 숨이 멈췄다. 그리고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사영은 웃었다. 나는 안 웃었다. 웃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손이 내 얼굴에 닿는 걸 허락한 게 4년 만이었다. 흉터 쪽이 아니라 입술이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빨라졌다. 이 사람은 내 얼굴을 만지면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12. 먼저 키스했다.

유엔롱 영화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옆에서 이사영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이마를 맞댔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키스는 안 한다. 내 규칙이었다. 키스를 하면 끝이다. 돌아올 수 없다. 그런데 했다. 내가 먼저. 규칙을 만든 놈이 규칙을 부쉈다. 이사영의 입술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흉터 쪽까지 번지는 것 같았다. 영화가 뭐였는지 기억 안 난다. 그 입술의 온도만 기억난다.

13. "좋아합니다."

귀가길에 내가 했다. 이사영이 아니라 내가 먼저. 왜 그 타이밍이었는지 모른다. 몽콕 야시장 옆 골목을 걷는데 이사영이 슬리퍼 끌면서 옆에서 콧노래를 불렀다. 음이 다 틀렸다. 그걸 듣고 있으니까 입에서 그냥 나왔다. 좋아합니다. 존댓말이 나온 건 긴장해서다. 존나 긴장해서다. 이사영이 멈춰 서서 올려다봤다. 연두색 눈이 가로등 불빛에 젖어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 걸음을 옮겼다. 대답이 무서웠다. 그런데 이사영이 뒤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따라왔다. 팔짱을 꼈다. 내 팔에. "나도요." 그게 전부였다. 나도요. 두 글자. 그 두 글자에 무릎이 풀렸다. 몽콕 골목에서 서른한 살 먹은 남자가 두 번째로 주저앉을 뻔 했다. 이사영은 내가 왜 멈칫했는지도 모르고 계속 콧노래를 불렀다. 음은 여전히 다 틀렸다.

14. 처음으로 재킷을 벗겼다.

이사영 앞에서. 안감이 보이게. 재킷 안감은 내 유일한 사적 영역이었다. 아무도 안 보는 곳. 그런데 이사영이 실밥이 뜯어진 걸 눈치채고 수선해주겠다고 했다. 검은 안감에 검은 실. 바느질하는 동안 이사영의 고개가 숙여져 있었고, 목덜미의 잔머리가 보였다. 나는 그걸 보면서 만지고 싶었다 가만히 있었다. 다 끝나고 재킷을 입었을 때, 안감이 달랐다. 같은 검은색인데 이사영의 바늘땀이 들어간 검은색은 따뜻했다.

15. 사랑해.

1월 13일. 침대에서. 이사영이 먼저 말했는지 내가 먼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거짓말이다. 기억난다. 내가 먼저 했다. 이사영이 내 셔츠를 입고 금붕어한테 아침인사를 하고 있었다. "잘 잤어, 물고기야." 수조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팠다. 좋은 쪽으로 아팠다. 그런 종류의 통증이 있는 줄 몰랐다. 사랑해. 소리가 작아서 이사영이 "뭐?" 하고 돌아봤다. 다시 말했다. 사랑해.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젖었다. 금붕어가 수조 안에서 한 바퀴 돌았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증인.

16. 오늘.

자정에 국수집에 갔는데 이사영이 없었다. 사장이 말했다. 안 왔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셩완까지 택시를 탈까 뛰어갈까 3초 고민했다. 뛰었다. 싱와 빌딩 계단을 7층까지 올라갔을 때 숨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그건 계단 때문이 아니었다.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이사영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문틀을 잡았다. 열이 39도였다.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 왔다. 물을 떠다 줬다. 이마에 수건을 얹었다.회사에는 반차를 냈다고 거짓말했다. 반차를 안 냈다. 무단결근이다. 구일오, 31세, LDC 이주 관리관, 경력 4년차. 무단결근은 처음이다. 해열제가 듣기 시작하고 이사영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을 때, 수건을 갈아주면서 생각했다. 이게 맞나. 맞았다. 이사영의 숨소리가 고르게 돌아왔을 때, 그게 답이었다.

17. 이사영이 귤을 깐다.

손톱 밑에 귤 껍질이 끼는 것도 모르고 깐다. 한 쪽을 내 입에 넣어준다. 나는 그걸 받아먹는다. 매번. 귤이 시면 이사영이 먼저 얼굴을 찡그린다. 내 입에 넣어놓고 자기가 찡그린다. 그게 우습다. 웃으면 이사영이 "왜 웃어" 한다. 설명할 수 없다. 시어도 괜찮다. 이사영이 깐 거니까.

18. 이사영의 잠버릇.

이불을 발로 찬다. 새벽 세 시에 이불을 다시 덮어준다. 네 시에 또 찬다. 다섯 시에 포기하고 내 셔츠를 벗어서 덮어줬다. 아침에 이사영이 내 셔츠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셩완의 아침은 늘 소란스러운데, 그 방 안만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고요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이 여자 때문에 망할 것이다. 괜찮았다.

19. 이사영의 폐.

기관지폐이형성증. 태어날 때부터.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다. 이사영은 그걸 "좀 약한 거"라고 말한다. 좀 약한 게 아니다. 오늘 새벽 숨소리를 들었다. 쌕쌕거렸다. 가슴에 손을 대면 갈비뼈 사이로 진동이 느껴졌다. 이사영은 자면서도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작았다. 뜨거웠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서 두려웠다 생각했다. 병원. 비용. 어떤 의사가 좋은지. 퀸메리인지 광화인지. 머릿속이 엑셀 시트처럼 돌아갔다. 감정이 올라오면 계획으로 덮는다. 버릇이다. 나쁜 버릇인 줄 안다. 그런데 이건 나쁜 버릇이 아닐지도 모른다.

20. 이 수첩은.

원래 주민 약점 블랙리스트였다. 체납 내역, 전과, 불법 증축, 가족 관계. 사람을 치우기 위한 정보들. 지금도 그렇다. 앞쪽 절반은. 뒤쪽 절반은 이사영이다. 귤 먹는 순서. 슬리퍼 끄는 소리의 패턴. 입술을 만질 때의 손가락 각도. 콧노래 목록. 이것도 블랙리스트인가. 아니다. 이건 내가 가진 유일하게 깨끗한 기록이다.

21. 이사영을 사랑하는 이유.

없다. 이유 같은 건 없다. 이유가 있으면 이유가 사라졌을 때 사랑도 사라진다. 그건 거래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거래를 너무 많이 해 본 인간이라 그 차이를 안다. 이사영은 이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지구가 도는 것처럼. 홍콩이 습한 것처럼. 구일오가 이사영을 사랑하는 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물리 법칙이다. 다만 한 가지. 이사영이 처음 내 입술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흉터 옆을, 피하지 않고 만졌을 때.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내 화상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고 있다. 그게 전부다.

[후일담]

구일오는 수첩을 덮었다. 만년필 뚜껑을 닫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또각, 울렸다. 이사영은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해열제가 들었는지 이마의 열이 내려가고, 숨소리가 고르게 돌아와 있었다. 구일오는 수첩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검은 안감에 검은 실로 수선한, 이사영의 바느질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수건을 다시 적셨다. 물을 짜면서 창밖을 봤다. 셩완의 정오. 빨래줄에 걸린 이웃집 셔츠가 바람에 펄럭이고, 어디선가 광동어 라디오가 새어 나왔다. 이 동네는 16일 뒤에 철거 고지서를 받는다. 그가 직접 돌릴 고지서를.

구일오는 수건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사영의 이마 위에 수건을 올렸다. 손가락이 이사영의 머리카락에 스쳤다. 갈색 생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그걸 한 올 한 올 떼어냈다.

"수프 사 와야지."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이사영의 손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