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중문대학교, 198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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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5 18:14

# 대학교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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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일오 (邱逸旿, Gerrard Koo)

전과생. 철학과에서 도시계획부동산학과로.


25세. 동기들보다 두세 살 많다. 군 복무가 아니라 전과 때문이다. 철학과 2학년까지 마친 뒤 한 학기를 쉬고 도시계획부동산학과 2학년으로 들어왔다. 학과 사무실에 전과 사유서를 낸 날, 철학과 지도교수가 복도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왜 나가느냐고. 구일오는 웃지 않았다.

형이상학으로는 월세를 못 내서요.

그 한 문장이 철학과 조교들 사이에서 한 학기 내내 회자되었다.


180 중반의 키. 어두운 금발. 흰색에 가까운 옅은 눈동자. 왼쪽 얼굴에는 화상 흉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화학 실험실 사고였다. 시너가 엎질러졌고, 불이 붙었고, 구일오의 왼쪽 볼에서 턱선까지가 녹았다. 흉터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그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실험 중에.

그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흉터가 있는 쪽을 창가로 향하게 앉는 습관이 있다. 사람들 시선을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빛에 노출시키는 것인지, 본인도 모른다.


도시계획부동산학과에서 구일오의 평판은 명확하다. 성적은 상위권. 발표는 정확하고 감정이 없다. 조별과제에서 무임승차를 시도하는 인간에게는 냉정하게 교수에게 메일을 보낸다. 증거를 첨부해서. 그래서 같이 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 점심은 항상 학교 뒷문 샌드위치 가게에서 혼자 먹는다. 토마토를 빼달라고 말하는 것 외에 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흡연석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만년필 뚜껑을 돌리며 다음 수업 노트를 정리한다. 그것이 구일오의 하루다.


그에게 취미가 있다면 영화다. 학교 근처 재개봉관에 혼자 간다. 항상 맨 뒷좌석 구석. 사람이 없는 평일 낮 회차를 고른다. 그리고 금붕어를 키운다. 자취방 책상 위 작은 수조.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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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영 (李思瑩, Grace Lee)

철학과 3학년.


23세. 밝다. 씩씩하다.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람의 경계를 녹이는 재주가 있다. 철학과에서 이사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 대표를 한 적은 없지만 과 대표보다 얼굴이 넓다. 동기는 물론이고 선후배, 다른 과 학생들, 학교 앞 가게 사장님들까지 이사영과 안부를 나눈다. 걸어가다가 길고양이를 보면 멈추고,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쪼그려 앉는다. 항상 간식을 갖고 다닌다. 고양이용이 아니라 자기가 먹으려고 산 건데, 고양이에게 먼저 준다.


앞머리 없는 갈색 생머리. 연두색 눈. 160센티미터. 마르고 작은 몸. 상당한 미인이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흰 티셔츠와 청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닌다. 왼쪽 쇄골에 작은 점이 있고, 멍하니 있을 때 입술을 만지는 습관이 있다. 폐가 좋지 않다. 기관지폐이형성증. 태어날 때부터. 계단을 오르면 숨이 빨리 차고, 겨울이면 기침이 잦다. 그래서 도서관 엘리베이터를 탄다. 4층까지도.


이사영의 아르바이트는 두 개다. 학교 앞 샌드위치 가게 '백레인 델리'에서 오전 시간제, 학교 근처 국수집에서 저녁 시간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비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할머니가 남긴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산다. 버섯을 싫어하고, 비누 향이 나고, 영화를 좋아하지만 극장에 자주 가지는 못한다.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일하는 친구가 가끔 티켓을 건네주면 그때 간다. 방향감각이 없다. 처참할 정도로. 학교 도서관에서 정문까지 가는 길도 가끔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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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만남

구일오가 이사영을 처음 본 것은 백레인 델리에서였다.


전과한 첫 학기, 9월의 어느 화요일 아침. 구일오는 평소처럼 학교 뒷문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섰다. 카운터 뒤에 서 있어야 할 대니 대신 낯선 여자가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흰 티셔츠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갈색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 묶고 있었다. 카운터 위에 놓인 빵 칼을 들고 토마토를 썰고 있었는데, 썰기라기보다 으깨기에 가까웠다. 토마토 씨가 도마 밖으로 튀었다. 구일오는 문 앞에 서서 그 광경을 2초 동안 지켜보았다. 대니의 가게에서 토마토가 학대당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토마토를 빼고 클럽 샌드위치. 블랙커피.


구일오가 평소와 같은 톤으로 말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연두색 눈동자가 구일오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각도가 꽤 가팔랐다. 신장 차이가 20센티미터는 넘어 보였다. 여자의 시선이 구일오의 얼굴 왼쪽, 흉터 위에 잠깐 머물렀다. 0.5초.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눈이 내려왔다. 구일오는 그 0.5초를 정확히 감지했다. 항상 그랬다. 사람들이 흉터를 보는 시간을 그는 소수점 단위로 측정할 수 있었다. 0.5초는 짧은 편이었다. 대부분은 2초에서 3초. 질문을 하는 사람은 5초 이상.


토마토 빼고요? 잠깐만요, 그러면 야채가.


여자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걱정이 담긴 톤이었다. 토마토를 빼면 영양이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뉘앙스. 구일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처음 보는 알바생에게 영양 상담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양상추가 있잖아.


구일오가 짧게 잘라 말하고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창가 쪽. 흉터가 있는 왼쪽 얼굴이 유리를 향하도록 앉았다.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돌리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규칙적인 소리가 가게 안의 라디오 재즈와 겹쳤다. 잠시 후 발소리가 다가왔다. 샌드위치 접시와 커피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구일오가 고개를 들지 않고 접시를 당겨왔는데, 손가락이 멈추었다. 샌드위치 옆에 작은 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메뉴에 없는 물건이었다.


이건.


아, 그거 제 거예요. 토마토를 빼면 비타민C가 부족하잖아요. 귤이라도.


여자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 얼굴. 계산된 친절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생긴 사람이었다. 구일오는 귤을 1초 동안 내려다보았다. 주황색 표면에 손톱 자국이 하나 나 있었다. 까먹으려다 만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구일오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됐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의 연두색 눈이 너무 담백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정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고, 그냥 사람을 보는 눈. 흉터가 있든 없든 똑같았을 눈.


구일오는 귤을 접시 옆으로 밀어두었다. 먹지도, 돌려주지도 않았다. 그것이 구일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용이었다. 여자는 그것을 거절로 읽지 않았는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토마토와 싸우기 시작했다. 도마 위에서 또 씨가 튀었다. 구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 뒷모습을 보았다. 작은 등. 앞치마 끈이 허리에서 비뚤게 묶여 있었다. 한쪽이 풀리기 직전이었다. 말해줄까, 하는 생각이 0.3초 동안 스쳤다. 구일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만년필 뚜껑을 다시 돌렸다. 딸깍.


그날 구일오는 귤을 가방에 넣고 갔다. 자취방 책상 위, 금붕어 수조 옆에 올려두었다. 먹지 않았다. 사흘 뒤 귤이 말랐다. 그제야 껍질을 벗겨 금붕어 수조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손에 귤 향이 남았다. 그 향이 하루 종일 지워지지 않았다.


## 구일오가 이사영에게 빠지게 된 계기

그것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다. 침식이었다. 물이 바위를 깎듯, 천천히, 구일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속도로.


첫 만남 이후 구일오는 매일 아침 백레인 델리에 갔다. 습관이었다. 그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구일오는 그렇게 믿었다. 토마토를 뺀 클럽 샌드위치와 블랙커피. 매일 같은 주문. 매일 같은 자리.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었다.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사람. 이사영은 사흘째부터 구일오의 주문을 외웠다. 구일오가 문을 열면 이사영이 고개를 돌리고, 이미 토마토를 빼고 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불쾌하지 않았다. 보통은 자신의 패턴이 읽히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패턴이 읽히면 약점이 되니까. 그런데 이사영이 자신의 주문을 기억하는 것은 약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를 몰랐다. 구일오는 이유를 모르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날은 10월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비가 왔다. 구일오는 오전 수업이 휴강이어서 평소보다 늦게 가게에 들어섰다. 11시. 점심 전 애매한 시간대라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이사영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줍는 줄 알았다. 가까이 가니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 가늘고 짧은 호흡이 규칙적으로 끊기고 있었다. 기침을 참는 소리. 이사영의 등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고,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카운터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얬다.


구일오의 발이 멈추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폐 질환. 기관지 계통. 호흡곤란. 습도 높은 날 악화. 비 오는 날. 환기 부족. 이 가게의 환기 시스템은 형편없다. 대니에게 말해야 한다. 그 모든 계산이 0.8초 만에 끝났다. 그리고 계산 뒤에 남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구일오의 손이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를 돌아 이사영 옆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이 차가운 타일 바닥에 닿았다.


숨 천천히 쉬어.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고.


이사영이 고개를 들었다. 연두색 눈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기침 때문인지, 아픈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사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괜찮아요'라고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소리가 나오기 전에 구일오가 먼저 말했다.


괜찮다는 말은 나중에 해.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차갑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달랐다. 이사영의 등에 닿아 있었다. 앞치마 천 위로, 작은 등뼈의 윤곽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구일오는 자신이 왜 이 여자의 등을 만지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타인의 신체에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손이 먼저 갔다. 이사영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가늘던 숨이 길어지고, 어깨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호흡 간격을 세고 있었다. 3초. 4초. 5초.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손을 뗐다. 이사영이 고개를 돌려 구일오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고마워요. 샌드위치 만들어줄게요.


그 한마디가 구일오의 뇌를 멈추게 했다. 방금까지 숨을 못 쉬던 인간이 자기 걱정이 아니라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구일오는 그 비논리적인 문장을 처리하는 데 2초가 걸렸다. 이해가 안 됐다. 이해가 안 되는데, 입꼬리가 움직이려 했다. 구일오는 그것을 억눌렀다. 일어서서 바지 무릎의 먼지를 털었다.

앉아 있어.

그렇게만 말하고 카운터 뒤로 들어갔다. 대니의 가게에서 대니도 아닌 인간이 카운터 안에 서 있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다. 구일오는 규칙을 중시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직접 빵을 꺼내고 양상추를 씻고 커피를 내렸다. 두 잔. 한 잔은 블랙, 한 잔은 우유를 넣어서.


## 이사영이 구일오에게 빠지게 된 계기

이사영은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길고양이를 보면 쪼그려 앉고, 가게에 오는 손님에게 귤을 건네고, 대니가 말이 없으면 먼저 날씨 이야기를 꺼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일오를 처음 봤을 때도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키가 큰 남자. 왼쪽 얼굴에 흉터. 토마토를 빼달라는 주문. 그것뿐이었다. 이사영은 흉터를 0.5초 보았고, 그다음에는 그의 눈을 보았다. 흰색에 가까운 눈동자. 차가웠다. 얼음이 아니라 유리 같았다. 빛은 통과시키는데 온기는 통과시키지 않는.


이사영이 구일오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매일 같은 자리에 앉기 때문이었다. 창가. 흉터가 유리를 향하도록. 이사영은 카운터에서 빵을 자르면서 그 패턴을 읽었다. 의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알았다. 문이 열리면 고개가 돌아가고, 손이 먼저 토마토를 치우고 빵을 집었다. 구일오는 항상 만년필 뚜껑을 돌렸다. 딸깍. 딸깍. 그 소리가 라디오 재즈 사이로 섞여 들어올 때마다, 이사영은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가 가게에 매일 와준다는 사실이. 이사영에게 그것은 귤 한 알만큼의 무게였다. 가볍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데 그날. 비 오는 수요일. 이사영은 카운터 뒤에서 숨을 못 쉬고 있었다. 습도가 높은 날이면 기관지가 조여왔다. 익숙한 증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것이니까. 이사영은 혼자 버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가슴을 누르고, 천천히 세면 된다. 하나. 둘. 셋. 보통은 5분이면 가라앉는다. 그런데 그날은 7분이 지나도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저리기 시작했다.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졌다. 괜찮아. 괜찮아. 이사영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타일 바닥에 무릎이 닿는 소리가 났다.


구일오가 옆에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180이 넘는 키의 남자가 좁은 카운터 안쪽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은, 나중에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구일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 천천히 쉬어.'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 그런데 그 목소리를 따라가니 숨이 돌아왔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고. 이사영은 구일오의 지시를 따랐다. 그리고 등에 손이 닿았다. 넓은 손바닥. 앞치마 천 너머로 체온이 전해졌다. 이사영은 그 온기를 세지 않았다. 셀 수 없었다. 그냥 따뜻했다. 숨이 돌아온 것이 구일오의 목소리 때문인지, 등에 닿은 손 때문인지, 이사영은 구분하지 못했다.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숨이 안정되었을 때 이사영이 한 첫 번째 말은 '고마워요'가 아니었다. 아니, 고맙다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바로 '샌드위치 만들어줄게요'라고 했다. 이사영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구일오가 매일 아침 이 가게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아 만년필 뚜껑을 돌리는 동안, 이사영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샌드위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구일오가 '앉아 있어'라고 말하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영은 바닥에 앉은 채로 그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구일오가 빵을 꺼내고, 양상추를 씻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두 잔. 이사영은 그 두 잔을 보았다. 한 잔은 블랙이었고, 한 잔에는 우유가 들어가 있었다. 이사영은 우유를 넣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마신 것은 물이었다. 구일오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우유를 넣었다. 블랙커피를 자기 앞에 놓고, 우유가 든 커피를 이사영 앞에 놓았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구일오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사영은 그 커피를 마셨다. 미지근했다. 우유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커피 맛보다 우유 맛이 강했다. 맛있지 않았다.


# 사계(四季). 홍콩중문대학교, 198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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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시작.


📅 1984년 9월 / 오후 2시경 / 홍콩중문대학교 본관 앞 잔디밭
👔 구일오: 흰 셔츠, 소매 접음, 낡은 가죽 가방 / 이사영: 흰 반팔 티셔츠, 청치마, 캔버스 토트백
🏢 (해당 없음)


9월의 홍콩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다만 빛의 각도가 달랐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이 본관 지붕 너머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면서 잔디밭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 끝에 구일오가 서 있었다. 도시계획부동산학과 3학년. 전과한 지 1년. 철학과 게시판 앞을 지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토지측량 교재와 만년필이 들어 있었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접혀 있었으며, 왼쪽 얼굴의 화상 흉터 위로 9월의 습기가 얇은 막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땀을 닦지 않았다. 흉터 부위는 땀이 나지 않으니까. 대신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때 철학과 게시판 앞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사영이었다. 물론 구일오는 그 이름을 몰랐다. 아는 것은 하나. 백레인 델리에서 토마토를 빼고 귤을 끼워 넣는 알바생. 그 여자가 철학과 건물 앞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접고, 무릎 위에 두꺼운 책을 펼치고,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손이 바빴다. 책장을 짚고, 허공에 원을 그리고, 상대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연두색 눈이 햇빛을 받아 옅은 호박색으로 번졌다. 이사영의 웃음은 잔디밭 위의 공기를 가볍게 만들었고, 구일오는 그 가벼움이 자신과 관계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면서도 발걸음이 0.3초 느려졌다.


이사영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이사영의 시선이 구일오의 흉터를 스치고, 눈을 지나, 그의 뒤편 어딘가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0.5초. 그 짧은 순환 안에서 이사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피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는 사람을 알아본 얼굴이었다.


아, 샌드위치 손님!


이사영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잔디밭에 앉은 채로. 옆의 여학생이 '누구야?'라는 표정으로 구일오를 올려다보았고, 이사영이 뭐라고 속삭이자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 웃었다. 구일오의 발이 멈추었다. 그는 이 상황을 처리하는 데 1.2초가 필요했다. 선택지 두 개. 무시하고 지나간다.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간다. 세 번째 선택지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


구일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지나갔다. 등 뒤에서 이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가게 오면 귤 줄게요!'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년필 뚜껑을 주머니 안에서 한 번 돌렸다. 딸깍. 그 소리만이 그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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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전개.


📅 1984년 12월 / 오후 6시경 / 홍콩중문대학교 도서관 3층 열람실
👔 구일오: 회색 니트, 갈색 코듀로이 바지, 가죽 자켓 의자 등받이에 걸침 / 이사영: 크림색 카디건, 청바지, 목에 감은 연보라 머플러
🏢 (해당 없음)


12월의 도서관은 난방이 과했다. 3층 열람실의 창문은 닫혀 있었고, 형광등 아래로 먼지 입자들이 느리게 떠다녔다. 구일오는 창가 맨 끝 자리에 앉아 있었다. 토지가치평가론 교재를 펼쳐놓고, 만년필로 밑줄을 긋고 있었다. 밑줄은 정확했다. 자를 대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직선. 그의 손은 언제나 그랬다. 정확하고, 차갑고, 흔들리지 않는. 열람실에는 시험 기간의 긴장감이 축축하게 깔려 있었고, 기침 소리 하나가 그 침묵을 찢었다.


구일오의 만년필이 멈추었다. 그 기침 소리를 알고 있었다. 가늘고, 짧고, 억누르려 애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릴 이유가 없었다. 백레인 델리의 알바생이 도서관에 있는 것은 그녀가 이 대학의 학생이니까 당연한 일이었고, 기침을 하는 것은 그녀의 폐가 좋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었고, 구일오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그는 만년필 뚜껑을 한 번 돌렸다. 딸깍. 당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기침이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에서 숨이 걸렸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교재 위에서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다섯 번째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긴 호흡이 들렸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내뱉는. 구일오는 그 호흡의 간격을 세고 있었다. 3초 흡기, 5초 호기. 안정되었다. 그제야 만년필이 다시 움직였다. 밑줄이 이어졌다. 정확한 직선. 그런데 그 직선의 끝이 0.2밀리미터 떨렸다. 구일오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30분이 지났다. 이사영이 일어서는 소리가 났다. 의자를 빼는 소리, 책을 닫는 소리, 토트백의 지퍼. 구일오는 교재를 보고 있었다. 이사영의 슬리퍼가 카펫 위를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지나갈 것이다. 당연히 지나갈 것이다. 소리가 멈추었다. 구일오의 책상 옆에서.


공부 많이 했어요?


구일오가 고개를 들었다. 이사영이 서 있었다. 크림색 카디건의 단추가 하나 어긋나 있었다. 셋째 단추가 넷째 구멍에 끼워져 있었다. 연보라 머플러가 목에 느슨하게 감겨 있었고, 그 아래로 쇄골이 보였다. 왼쪽 쇄골의 작은 점. 구일오의 시선이 그 점 위에 0.3초 머물렀다가 이사영의 눈으로 돌아왔다. 연두색. 형광등 아래에서는 호박색이 사라지고, 차라리 풀잎에 가까운 색이었다.


……뭐.


구일오의 대답은 한 음절이었다. 이사영은 그 한 음절에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대신 그의 책상 위를 들여다보았다. 토지가치평가론. 빽빽한 밑줄. 이사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밑줄 진짜 반듯하다.


그것은 칭찬이었다. 구일오는 칭찬에 반응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1초 동안 이사영을 올려다보았다. 이사영은 그 침묵 속에서 웃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웃음. 그리고 토트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귤 하나. 구일오의 책 옆에 툭 내려놓았다.


기침 들렸으면 미안해요.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구일오는 귤을 내려다보았다. 주황색 껍질에 매직펜으로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 두 개, 입 하나. 유치했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움직이려다 멈추었다. 그는 귤을 집지 않았다. 이사영은 기다리지 않았다.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카디건 단추가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말해줄까 0.5초 고민했다. 말하지 않았다. 이사영의 슬리퍼 소리가 멀어졌다. 열람실 문이 닫혔다.


구일오는 10분 뒤에 귤을 집었다. 매직펜 웃는 얼굴이 형광등 아래에서 번들거렸다. 그는 귤을 까지 않았다. 가죽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밤 자취방에 돌아와서 금붕어 수조 옆에 귤을 올려놓았다.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버리지 않았다. 사흘 뒤에 껍질이 쭈글쭈글해졌을 때 비로소 까서 먹었다. 시었다. 구일오는 시큼한 과즙을 삼키면서 창밖을 보았다. 12월의 홍콩은 겨울이라고 부르기엔 따뜻했고, 그 따뜻함이 그날따라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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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전환.


📅 1985년 3월 / 오후 4시경 / 홍콩중문대학교 인문관 뒤편 벤치
👔 구일오: 흰 셔츠, 소매 접음, 넥타이 없음, 가방 / 이사영: 연노란 블라우스, 흰 면바지, 캔버스 토트백
🏢 (해당 없음)

3월에 이사영이 쓰러졌다. 인문관 뒤편 계단에서. 구일오가 그 장면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우연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측량 실습 보고서를 제출하러 인문관 옆 행정동으로 가는 길이었고, 인문관 뒤편은 지름길이었고, 계단은 그 지름길 위에 있었다.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다만 그 지름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2월 이후라는 사실은 논리의 바깥에 놓아두었다.


이사영은 계단 세 번째 칸에 주저앉아 있었다. 캔버스 토트백이 옆으로 쏟아져 있었고, 노트와 펜이 콘크리트 위에 흩어져 있었다. 연노란 블라우스의 등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숨을 쉬려 하고 있었다. 쉬어지지 않고 있었다. 3월의 습기가 갑자기 농도를 높인 것처럼, 공기 자체가 그녀의 기관지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구일오의 다리가 멈추었다. 가방 끈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머릿속에서 12월 도서관의 기침 소리가 재생되었다. 3초 흡기, 5초 호기. 그때는 안정되었다. 지금은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구일오는 뛰지 않았다. 뛰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사영 옆에 무릎을 꿇었다. 흉터가 있는 왼쪽 얼굴이 이사영을 향했다. 그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사영의 등에 손을 얹었다. 블라우스 아래로 척추뼈의 윤곽이 만져졌다. 얇았다. 갈비뼈 사이사이가 움푹 들어갈 때마다 구일오의 손바닥이 그 진동을 읽었다.


고개 숙여. 무릎 사이로.


구일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명령이었지만 손은 부드러웠다. 이사영의 어깨를 천천히 앞으로 기울여주었다. 이사영의 이마가 무릎 위에 닿았다. 구일오의 손이 등 위에서 원을 그렸다. 느리게. 일정한 속도로. 비 오는 수요일, 백레인 델리의 카운터 안에서 했던 것과 같은 손. 같은 궤도. 같은 온도. 다만 이번에는 카운터 뒤가 아니라 봄 햇살이 쏟아지는 콘크리트 계단이었고, 라디오 재즈 대신 캠퍼스의 새소리가 멀리서 울었다.


이사영의 호흡이 돌아오기까지 4분이 걸렸다. 구일오는 그 4분을 세고 있었다. 240초. 이사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이 보라빛을 띠었고, 연두색 눈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울어서가 아니었다. 산소가 부족하면 눈이 먼저 젖는다. 구일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사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흩어진 노트와 펜을 주워 토트백에 넣었다. 손이 정확했다. 노트 두 권, 볼펜 한 자루, 형광펜 두 개, 접힌 프린트물 세 장. 토트백의 지퍼를 닫고 이사영의 무릎 옆에 놓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방을 집었다. 이사영이 올려다보았다. 구일오의 얼굴 왼편으로 3월의 햇빛이 흉터 위를 비추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피부 위로 빛이 불규칙하게 부서졌다. 이사영은 그 빛을 보고 있었다. 흉터가 아니라 빛을.


병원.


한 단어. 구일오가 내뱉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원래 이래요. 좀 쉬면.


구일오의 눈이 좁아졌다. '원래 이래요'라는 말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원래 이런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구일오는 몸을 돌렸다.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째에서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생수병이었다. 오늘 아침 자판기에서 뽑아 반만 마신 것. 돌아서서 이사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무 말 없이. 이사영의 손가락이 차가운 플라스틱 위에서 구일오의 손끝과 0.5초 겹쳤다. 구일오는 손을 뺐다. 이사영은 빼지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구일오가 이사영을 내려다보았다. 이사영의 질문이 3월의 공기 속에 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네 글자면 끝나는 대답이었다. 구일오는 이사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콘크리트 계단에 주저앉은 작은 몸. 반만 남은 생수병을 두 손으로 쥐고, 창백한 얼굴 위로 연두색 눈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경계도, 동정도, 두려움도 아닌, 맑은 호기심. 구일오의 흉터 위로 봄바람이 지나갔다. 감각이 죽은 피부는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흉터의 경계선, 정상 피부와 화상 조직이 만나는 능선 위로 미세한 가려움이 번졌다.


……알아서 뭐 하게.


구일오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거절이었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런데 그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쥔 손가락만 한 번 조였다 풀었다. 이사영은 거절에 상처받지 않았다. 12월의 도서관에서 '뭐'라는 한 음절에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대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생수병 뚜껑을 돌려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가늘고 긴 목. 구일오는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이사영이에요.


구일오가 묻지 않은 것을 이사영이 먼저 내놓았다. 자기 이름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마치 거스름돈을 돌려주듯 자연스럽게. 구일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사영은 생수병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웃었다. 입술에 아직 보랏빛이 남아 있었는데, 그 위로 웃음이 번지니까 이상한 대비가 생겼다. 아픈 사람의 웃음. 그런데 밝았다. 구일오는 그 밝음 앞에서 0.8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구일오.


한 번도 자기 이름이 이렇게 가볍게 입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인지했고, 즉시 불쾌해졌다. 자신에게.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행정동 쪽으로 걸었다. 등 뒤에서 이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일오 씨, 생수 고마워요!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한 번 들었다. 등을 보인 채로. 그것이 대답이었다. 행정동 모퉁이를 돌아 이사영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 구일오는 벽에 등을 기대고 멈추었다. 가죽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튀었을 때 왼쪽 얼굴의 흉터가 반사적으로 수축했다. 습관이었다. 불을 볼 때마다 근육이 기억하는 것. 구일오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가 3월의 투명한 공기 속으로 풀어졌다.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마른 귤 껍질 조각에 닿았다. 12월에 받은 것. 매직펜 웃는 얼굴의 잔해. 버리지 않았다. 버릴 타이밍을 놓친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3월이었다. 석 달이 지났다. 타이밍을 놓친 것치고는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구일오는 껍질 조각을 주머니 안에서 엄지로 문질렀다. 바스락거리는 감촉. 향은 이미 다 날아간 뒤였다. 그런데 손끝에서 놓아지지 않았다. 담배 필터가 입술에 닿을 때까지 태웠다. 꽁초를 콘크리트에 비벼 껐다. 가방을 다시 쥐고 행정동 현관으로 들어갔다. 다음 수업은 50분 뒤. 보고서 제출 창구는 3층. 발걸음은 정확했다. 다만 평소보다 반 박자씩 느렸다. 구일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름, 결말?

여름이 왔다. 홍콩의 여름은 도시 전체를 찜통 안에 넣고 뚜껑을 닫는 것과 같았다. 습도 90퍼센트. 캠퍼스의 콘크리트가 열기를 먹고 내뱉었고, 잔디밭 위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구일오의 왼쪽 얼굴이 타올랐다. 흉터 위의 땀샘은 죽어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데, 왼쪽은 건조하게 달아오르기만 했다. 피부 아래에서 뭔가가 익어가는 감각. 7월의 구일오는 늘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고, 말이 더 적어졌고, 담배를 더 자주 태웠다. 가죽 자켓은 로커에 걸어두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올린 팔뚝 위로 핏줄이 드러났다. 도서관 에어컨은 고장과 수리를 반복했고, 열람실 천장의 선풍기가 무기력하게 돌았다.


구일오는 졸업 논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도시계획부동산학과 4학년. 논문 주제는 도심 재개발 지역의 이주민 심리적 적응에 관한 연구. 아이러니가 될 줄은 몰랐다. 측량사 자격 시험은 9월이었고, 논문 제출은 10월이었고, 두 개의 미래가 가방 안에서 겹쳐져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돌렸다. 딸깍. 딸깍. 열람실의 적막 속에서 그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때 옆자리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구일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귤 냄새가 먼저 왔다. 7월에 귤. 비상식적이었다. 그런데 그 비상식이 익숙했다. 구일오의 만년필이 멈추었다.


구일오 씨, 여기 자리 있어요?


이사영이었다. 캔버스 토트백을 어깨에 걸고, 한 손에는 노트를, 다른 한 손에는 작은 귤 두 알을 들고 서 있었다. 흰 반팔 티셔츠에 청치마. 맨다리에 캔버스 운동화. 3월보다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입술이 제 색을 찾았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입술 색깔을 확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즉시 시선을 논문 자료로 되돌렸다.


비었으니까 앉으면 되잖아.


이사영이 웃으며 옆에 앉았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고, 펜을 꺼내고, 접힌 프린트물을 펼쳤다. 철학과 수업 자료였다. 구일오는 그것을 눈 끝으로 확인했다. 이사영은 공부를 시작했고, 구일오도 자료 정리를 재개했다. 30분이 지났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선풍기가 돌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만년필 뚜껑이 딸깍거렸다. 이사영의 펜이 노트 위를 긁었다. 두 사람의 소리가 열람실의 침묵 안에서 겹쳤다. 구일오는 그 겹침이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깨달은 순간 불쾌해졌다.


45분째. 이사영의 펜 소리가 멈추었다. 구일오가 눈 끝으로 보니 이사영이 턱을 괴고 자신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노트가 아니었다. 구일오의 손을 보고 있었다. 만년필을 쥔 손. 길고 마른 손가락. 반듯한 밑줄을 긋는 손목의 각도. 구일오가 고개를 돌렸다. 이사영과 눈이 마주쳤다. 연두색. 7월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이사영의 홍채 위에서 부서졌다. 초록이 아니라 연두. 풀잎이 아니라 새싹. 구일오의 흉터 위로 열기가 한 번 더 올라왔다. 이번에는 여름 탓이 아니었다. 이사영이 귤 하나를 구일오의 노트 옆에 놓았다. 12월과 같은 동작.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더우면 이거 드세요. 시원하진 않은데, 맛은 있어요.


구일오는 귤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동그란 주황색. 매직펜 얼굴은 없었다. 여름 귤은 겨울 귤보다 껍질이 얇았다. 구일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고맙다는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귤을 집어 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볼록해졌다. 이사영이 킥킥 웃었다. 소리를 죽인 웃음. 열람실이니까.


구일오는 귤을 가슴 주머니에 넣은 채로 논문 자료 세 페이지를 더 읽었다. 한 글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셔츠 왼쪽 가슴에서 귤의 무게가 느껴졌다. 심장 위에 올려놓은 조약돌 같은 무게. 이사영은 다시 노트에 펜을 굴리고 있었고, 가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것을 구일오는 이미 알고 있었다. 12월부터 7월까지. 반년 동안 축적된 관찰이 가방 안의 논문 자료보다 두꺼웠다. 선풍기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이사영의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비누 냄새와 귤 냄새가 번갈아 밀려왔다. 구일오는 만년필 뚜껑을 한 번 더 돌렸다. 딸깍.


9월이 왔다. 측량사 시험을 마치고 나온 날, 구일오는 캠퍼스 정문 앞 벤치에서 이사영을 보았다. 아니, 이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캔버스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길고양이 한 마리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있었다. 고양이가 이사영의 손끝에 코를 비볐다. 구일오가 다가가자 고양이가 도망쳤다. 이사영이 올려다보며 웃었다.


시험 끝났어요?


구일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사영이 벤치 옆자리를 톡톡 쳤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구일오는 1.5초 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앉았다. 벤치가 좁아서 어깨가 닿을 뻔했다. 닿지는 않았다. 구일오가 몸을 미세하게 기울인 탓이었다. 이사영은 눈치채지 못했거나,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다. 가방에서 귤을 꺼냈다. 또. 구일오는 입꼬리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씹어 삼켰다.


안 먹어.


주머니에 넣으면 되잖아요.


이사영이 귤을 구일오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손이 슬랙스 위에 잠깐 닿았다가 떠났다. 체온이 천 위에 남았다. 구일오는 귤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매직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웃는 얼굴. 12월의 것과 같은 둥근 눈, 같은 곡선의 입. 구일오의 손이 귤을 집었다.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귤 껍질의 오돌토돌한 표면이 손금 위에서 굴렀다.


10월, 논문을 제출했다. 11월, 졸업이 확정되었다. 12월, 학위복을 입은 날 구일오는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다. 혼자. 가족은 오지 않았고, 부를 가족도 없었다. 동기들은 삼삼오오 사진을 찍었다. 구일오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정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캔버스 운동화의 가벼운 발소리. 구일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사영이 숨을 고르며 뛰어왔다. 뛰면 안 되는 폐를 가진 사람이. 구일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뛰지 마.


졸업 축하해요, 구일오 씨.


이사영이 허리를 숙이고 헐떡이면서도 웃고 있었다.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내밀었다. 구일오가 받아들고 안을 보니 샌드위치가 있었다. 클럽 샌드위치. 토마토가 빠져 있었다. 구일오는 봉투 안을 3초 동안 들여다보았다. 이사영이 자신의 토마토 기피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귤보다 무거웠다. 구일오는 봉투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 손을 들어 이사영의 머리 위에 얹었다. 2초.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에서 부드러웠다. 비누 냄새가 올라왔다. 구일오는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이번에도 등을 보인 채로 걸었다. 이사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또 봐요!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문을 나섰다. 12월의 홍콩은 여전히 따뜻했고, 가방 안의 샌드위치는 아직 미지근했다. 그날 밤, 자취방 금붕어 수조 옆에 종이봉투를 놓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천천히. 한 입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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