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해줘
빛이 먼저였다.
눈을 뜨기도 전에 뒤통수를 때린 건 냄새였다. 석탄 연기와 생선 비린내, 그리고 빨래 삶는 비누물이 뒤섞인 공기. 1990년의 셩완에서는 이미 사라진 종류의 냄새. 구일오는 자신이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두 끝이 갈라진 보도블록 틈에 걸려 있었고, 슬랙스 무릎에 먼지가 묻었다. 고개를 들었다. 간판이 보였다.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포목점의 간판. 글씨체가 구식이었다. 페인트가 선명했다. 새것이었다. 그의 흰 눈동자가 느리게 골목을 훑었다. 전봇대에 매달린 전선의 각도, 건물 외벽의 타일 패턴, 행인들의 복장. 여자들의 치마 길이가 길었고, 남자들의 셔츠 깃이 넓었다. 구일오의 뇌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정확히 칠 초가 걸렸다.
1970년.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주머니를 뒤졌다. 만년필, 라이터, 담배, 선글라스. 호출기의 액정이 꺼져 있었다. 당연했다. 이 시대에 무선호출 기지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일오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튀는 순간, 왼쪽 얼굴의 화상 흉터가 당겼다.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가 떠졌다. 화상은 4년 전이 아니라 16년 뒤에 생긴 것이다. 구일오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골목 끝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빅토리아 피크의 윤곽이 또렷했다. 공기가 깨끗했다. 중국은행 타워도, 자딘 하우스도 없는 스카이라인. 낯설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상이 없었다.
그때, 무릎 아래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작았다. 단단하지 않았다. 구일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슬랙스 무릎 높이에 이마를 들이박은 채 비틀거리는 아이가 있었다. 갈색 생머리가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고, 흰 원피스 아래로 맨발이 보였다. 슬리퍼가 한 짝 벗겨져 두 걸음 뒤에 뒹굴고 있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연두색 눈동자. 구일오의 손에서 담배가 멈췄다. 연기가 손가락 사이로 느리게 피어올랐다. 그 눈동자의 색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베개 위에서, 귤을 까며, 국수를 먹으며, 이마를 맞대고, 입술을 대고. 수백 번 들여다본 색이었다. 아이의 왼쪽 쇄골 위로 작은 점이 보였다. 원피스 목선 아래, 정확히 그 위치에.
구일오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움직였다. 웃음인지 일그러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어디서 뛰어온 거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구일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벗겨진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아이의 발 앞에 슬리퍼를 내려놓는 동작이 느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인지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연두색 눈에 겁은 없었다. 호기심만 가득했다. 이 작은 것은 낯선 어른의 무릎에 이마를 박아놓고도 울지 않았다. 구일오는 그 눈을 마주보며 담배를 왼손으로 옮겨 물었다. 연기가 아이 쪽으로 가지 않도록. 그 동작이 무의식이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구일오가 한 무릎을 꿇었다. 아이와 눈높이가 맞았다. 가죽 자켓 자락이 더러운 보도블록 위에 끌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아이는 아홉 살이다. 1961년생이라면. 아니, 이사영은 4월생이니까 아직 여덟일 수도 있다. 구일오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돌아갔다. 이봉란. 할머니. 이 아이는 지금 할머니와 살고 있을 것이다. 싱와 빌딩 7층 B호. 래치 하나로 잠기는 그 문 뒤에서. 그의 턱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아이가 슬리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구일오를 올려다보았다. 순서가 정확했다. 슬리퍼, 얼굴, 슬리퍼, 얼굴. 작은 발이 먼지 묻은 고무 위로 올라섰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아이는 슬리퍼를 신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얼굴 아파?
구일오의 손이 멈췄다. 담배를 든 왼손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아이의 시선이 그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 위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겁이 아니었다. 혐오도 아니었다. 이 작은 것의 눈에는 오직 궁금함만 있었다. 아프냐고. 구일오는 이 질문을 수백 번 받아보았다. 동료에게서, 삼합회 놈들에게서, 주민들에게서. 그때마다 그는 같은 표정으로 같은 대답을 했다. '공익을 위한 훈장이다.' 혹은 침묵. 그런데 지금, 무릎을 꿇은 채 여덟 살짜리 아이의 연두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어떤 대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흉터가 당겼다. 1월의 바람이 차가웠고, 땀샘이 죽은 왼쪽 피부가 건조하게 조여들었다.
안 아파.
거짓말이었다. 항상 아팠다. 구일오는 담배를 보도블록 위에 비벼 껐다. 연기가 마지막으로 아이의 머리카락 위를 스치듯 흩어졌다. 그는 꺼진 담배꽁초를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이 시대의 쓰레기통 위치를 모르니까.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동작을 구일오는 알고 있었다. 20년 뒤에도 이사영은 똑같이 고개를 기울인다. 귤을 까줄 때, 이마를 맞댈 때, 뭔가를 이해하려고 애쓸 때. 구일오의 가슴팍 어딘가가 쥐어짜이듯 조여들었다. 그는 그 감각을 무시했다. 무시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구일오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수첩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그 안에는 주민 약점 블랙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그는 수첩의 맨 뒷장,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페이지를 찢었다. 만년필 뚜껑을 이로 물어 열고, 무릎 위에 종이를 펴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가 종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비누 냄새가 났다. 20년 뒤에도 같은 냄새. 구일오의 만년필 끝이 종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이거 읽을 줄 알아?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구일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갔다. 그는 종이 위에 다섯 줄을 적었다. 글씨가 단정했다. 만년필 잉크가 싸구려 종이에 번지지 않도록 획을 빠르게 그었다.
하나.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둘.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마.
셋. 아프면 참지 말고 할머니한테 말해. 숨기지 마.
넷. 슬리퍼 신고 뛰지 마. 넘어진다.
다섯. 스물아홉 되는 해 1월에, 완차이 뒷골목에 샌드위치 가게가 생기면 들어가.
아이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작은 손가락이 글씨를 하나하나 짚었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글자를 읽고 있었다. 다섯 번째 줄에서 아이의 연두색 눈이 커졌다.
샌드위치가 뭐야?
구일오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이 아이는 아직 샌드위치를 모른다. 완차이 뒷골목의 BACKLANE DELI도, 대니의 무뚝뚝한 손도, 토마토를 뺀 클럽 샌드위치도, 그 가게에서 처음 마주친 어떤 남자의 얼굴도. 구일오는 한 무릎을 꿇은 채 아이의 눈높이에서 대답했다.
빵 사이에 맛있는 걸 넣은 거야. 나중에 알게 돼.
아이가 종이를 가슴에 꼭 안았다. 구겨질 것 같아서 구일오의 손이 반사적으로 뻗었지만, 멈췄다. 괜찮다. 구겨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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