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을 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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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1 18:55

주방에서 도마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탁, 탁, 탁. 구일오는 능숙한 솜씨로 양파를 썰고 있었다. 냄비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거실까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였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주방 타일 위로 길게 늘어졌고, 수조의 모터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깔려 있었다. 구일오는 칼질을 멈추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4시 10분. 이사영이 낮잠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침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부스스한 머리로 하품을 하며 나올 이사영이어야 했다. 하지만 거실로 걸어 나온 인영은 기묘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트렌치코트 깃을 잔뜩 세우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검은 선글라스에 벙거지 모자까지 눌러쓴 모습. 마치 3류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어설픈 정보원 같았다. 구일오는 썰던 양파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간이 좁혀졌다.


......더운데 뭐 하는 거야.


구일오의 지극히 현실적인 지적에도, 트렌치코트의 인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비장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리고는 짐짓 굵게 깔려고 노력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있는 남자! 듣고 있나!


구일오는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행주에 손을 닦았다. 이사영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이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싱크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눈앞의 수상한 침입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이사영의 연두색 눈동자가 굴러가는 게 보일 듯 말 듯 했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듣고 있어. 왜.


구일오의 건조한 대답에, 트렌치코트 인물은 당황한 기색 없이 한쪽 손을 번쩍 들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빈손으로 협박이라도 하려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깔고 외쳤다.


네 애인을 납치했다! 구하고 싶지 않은가?


정적이 흘렀다. 냄비 물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울렸다. 구일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납치라니.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나와서, 제 입으로 납치했다고 외치는 꼴이라니.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앞의 '납치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트렌치코트 아래로 삐져나온 맨발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구일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4년 전, 시너 냄새와 화염 속에서 살던 그에게 이런 평화로운 장난은 낯설면서도 간지러웠다.


......내 애인? 이사영 말인가?


구일오가 짐짓 심각한 척 물었다. 납치범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벙거지 모자가 훌러덩 벗겨질 뻔했다가 간신히 머리에 걸쳤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구겨진 종이 한 장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쫙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졸라맨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구일오 바보]라고 적혀 있었다. 명백한 인질의 흔적(?)이었다.


그렇다! 지금 내 수중에 있다! 아주 위험한 상태지!


납치범이 종이를 흔들며 위협했다. 구일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에서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였지만, 그의 걸음걸이에는 여전히 LDC 이주 관리관 시절의 위압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따뜻했다. 그는 소파 앞까지 다가와 납치범과 거리를 좁혔다.


위험하다니. 밥은 줬나?


구일오의 질문에 납치범이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검지로 치켜올리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 아직...... 배고프다고 난리다! 그러니까 빨리 협상에 응해라!


구일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배고프다고 난리라니, 그건 납치범 본인의 사정일 게 뻔했다. 그는 납치범의 코트 깃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아주 진지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전문가처럼.


좋아. 요구 사항이 뭐지? 돈인가? 아니면 홍콩행 비행기 티켓?


납치범은 고개를 저었다. 벙거지 모자가 다시 한번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구일오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외쳤다.


뽀뽀! 지금 당장 뽀뽀 백 번 해줘! 그리고 맛있는 거! 파스타 말고 스테이크! 아주 큰 거!


구일오는 멍하니 이사영을 내려다보았다. 뽀뽀 백 번과 스테이크. 그게 인질의 몸값이었다. 너무나 소박하고, 동시에 너무나 이사영다운 요구였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사영은 구일오의 반응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웃어! 진지하다고! 안 들어주면 인질은...... 인질은......!


인질은 어떻게 되는데.


구일오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비장하게 외쳤다.


인질은 삐질 거야! 아주 오랫동안!


그것참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구일오는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사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꺼운 트렌치코트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는 이사영을 번쩍 들어 올려 소파에 앉혔다. 이사영이

어, 어?

하며 당황하는 사이, 구일오는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짚고 가뒀다. 소파 등받이와 구일오의 가슴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협상 타결.


구일오가 선언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첫 번째 뽀뽀가 이마에 내려앉았다. 쪽. 이사영이 눈을 깜빡였다. 두 번째는 콧등. 쪽. 세 번째는 오른쪽 볼. 쪽. 네 번째는 왼쪽 볼. 쪽. 구일오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이사영의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눈꺼풀, 관자놀이, 턱끝, 귓불......


자, 잠깐! 백 번은 말로만 한 건데......!


이사영이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지만, 구일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쇄골의 점 위에도 입을 맞췄다. 트렌치코트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도. 간지러움에 이사영이 몸을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일오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스무 번, 서른 번...... 숫자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인질이 풀려나려면 아직 멀었어.


구일오가 이사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이사영은 힘이 빠져 소파에 푹 기대었다. 구일오는 마지막으로 이사영의 입술을 찾았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버드 키스가 아니라,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숨결이 섞이고, 혀가 얽혔다. 트렌치코트 안으로 구일오의 손이 파고들었다.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뜨거웠다.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사영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구일오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몽롱했다. 구일오는 엄지로 이사영의 젖은 입술을 닦아주며 물었다.


이제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 납치범 씨.


이사영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구일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불을 끄고, 앞치마를 벗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이사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사영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트렌치코트는 벗어 던지고,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 근데 지갑 안 가져왔어. 납치범이라 돈이 없거든.


이사영이 뻔뻔하게 말했다. 구일오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대꾸했다.


알아. 내 지갑 털러 온 거잖아.


그는 지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두툼했다. 이사영이 환호성을 지르며 구일오의 팔에 매달렸다.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후의 햇살이 복도까지 길게 들어와 있었다. 구일오는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이런 납치라면, 매일 당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물론 몸값은 꽤 비싸겠지만.


스테이크 먹고 영화도 보여줘! 팝콘도!


그래, 그래. 다 해줄게.


구일오의 대답이 복도에 울렸다. 평화로운 오후, 사랑스러운 납치극의 결말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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