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팩
오후의 햇살이 블라인드 틈새로 비스듬히 들어와 거실 바닥에 줄무늬를 그렸다. 구일오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익숙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냄새 대신,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과 미미한 물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는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놓고, 열쇠 꾸러미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짤랑, 하는 금속음이 조용한 집안에 울렸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수조의 모터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그 앞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이사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평소라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왔어?' 하고 물었을 텐데, 오늘은 미동도 없었다. 구일오는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TV는 꺼져 있었고, 라디오도 침묵했다. 이사영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구일오가 소파 뒤로 다가가며 인기척을 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손을 짚고 몸을 숙여 이사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구일오의 눈이 커졌다. 이사영의 입술 위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거대하고, 번들거리고, 지독하게 분홍색인 입술 모양의 물체. 그것은 이사영의 입을 완전히 덮고도 남을 만큼 컸다. 젤리처럼 말랑해 보이는 질감 위로 오후의 햇살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이사영은 그 상태로 눈만 깜빡이며 구일오를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눈동자에 당혹감과 체념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구일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넥타이를 풀던 손이 멈췄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시선이 분홍색 덩어리와 이사영의 눈을 오갔다.
......그게 뭐야.
구일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황당함보다는 순수한 의문에 가까웠다. 이사영은 대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무선 호출기 단말기를 들어 보였다. 액정 화면에 미리 입력해 둔 문자가 떠 있었다. [접착력이 너무 강해서 안 떨어져.] 구일오는 문자를 읽고 다시 이사영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 팩 가장자리가 피부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었다. 억지로 떼어내려 한 흔적인지 주변 피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만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소파를 돌아 이사영 옆에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무게감에 눌려 내려갔다. 구일오는 손을 뻗어 이사영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엄지로 팩의 가장자리를 살살 문질러 보았다. 끈적했다. 싸구려 고무 냄새와 인공적인 딸기 향이 훅 끼쳐왔다. 이사영이 '읍, 읍' 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봉인된 탓에 웅얼거리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구일오는 턱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접착 상태를 확인했다. 진지했다. 마치 재개발 구역의 불법 구조물을 검사하는 건축물 안전 진단관처럼.
어디서 샀어.
구일오가 물었다. 이사영이 손가락으로 거실 탁자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화려한 색상의 포장지가 뜯겨져 있었다. [키스를 부르는 입술! 강력 보습 & 플럼핑 효과!] 라는 문구가 조잡한 폰트로 인쇄되어 있었다. 구일오가 포장지를 집어 들고 뒷면의 성분표를 훑어보았다. 알 수 없는 화학 성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포장지를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이사영을 보았다. 분홍색 젤리 덩어리가 이사영의 입술을 꽉 물고 있는 꼴이,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웃음을 자아냈다.
강력하긴 하네. 보습이 아니라 접착이.
구일오가 중얼거렸다.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의 힘줄이 불거졌다. 이사영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구일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와 중지로 팩의 한쪽 끝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힘을 주어 당겼다. 찌익, 하는 소리가 났다. 이사영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휘어졌다. 아픈 모양이었다. 구일오는 즉시 손을 멈췄다. 팩은 요지부동이었다. 피부만 붉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그는 손을 떼고 이사영의 붉어진 입가를 엄지로 쓸어주었다.
그냥 떼면 살점 떨어지겠는데.
구일오의 진단은 냉정했다. 이사영이 울상을 지으며 단말기를 다시 조작했다. [어떡해? 나 평생 이러고 살아야 돼?] 구일오는 그 문장을 보고 픽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흉터가 있는 왼쪽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여유로워 보였다. 이사영의 절박함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평생 그러고 살면, 밥은 어떻게 먹고.
구일오가 물었다. 이사영이 콧소리로 힝, 하고 울었다. 구일오는 잠시 그 모습을 감상했다. 입술을 잃어버린 인어공주도 아니고, 입술이 너무 커져버린 오리가 된 연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걸어가며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서 식탁 의자에 걸었다. 냉장고를 여는 소리,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 그리고 다시 닫는 소리가 들렸다. 구일오가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작은 그릇과 면봉이 들려 있었다. 그릇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올리브 오일이었다.
구일오는 다시 이사영 옆에 앉았다. 면봉에 오일을 듬뿍 적셨다. 그리고 이사영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턱을 잡은 손길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는 면봉 끝을 팩과 피부 사이의 경계선에 갖다 대었다. 차가운 오일이 스며들었다. 구일오는 집중했다. 마치 오래된 문서의 봉인을 해제하듯, 아주 섬세하게 면봉을 굴렸다. 이사영은 숨을 죽이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흰색 눈동자가 가까이 있었다. 속눈썹이 길었다. 구일오의 숨결이 이사영의 코끝에 닿았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입술 찢어진다.
구일오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이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볼을 지지하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오일이 스며들면서 접착력이 조금씩 약해지는지, 팩의 가장자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일오는 인내심 있게 작업을 계속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오일을 묻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구일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팩과 입술 사이의 틈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사영은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공기의 감촉을 느꼈다. 시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팩의 절반 정도가 떨어졌다. 덜렁거리는 분홍색 젤리 아래로 이사영의 진짜 입술이 보였다. 붉게 부어 있었다. 구일오는 면봉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손가락에 오일을 묻혔다. 그리고 직접 팩을 잡았다. 미끌거리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는 이사영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제 뗄 거야. 조금 따가울 수도 있어.
이사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구일오는 망설임 없이, 하지만 부드럽게 팩을 떼어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이사영이
아!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구일오는 떼어낸 팩을 탁자 위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사영의 입술을 살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팩의 성분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도톰해져 있었다. 플럼핑 효과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됐네.
구일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영은 얼얼한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기름 맛이 났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려 했지만, 구일오가 손목을 잡았다. 그는 이사영의 손을 무릎 위로 내리고, 다시 턱을 잡았다. 부어오른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오일 때문에 번들거리는 입술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구일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티슈를 뽑아 입가에 묻은 오일을 닦아주었다. 톡톡, 두드리듯이.
이런 거 안 붙여도 충분한데.
구일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잠겨 있었다. 이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구일오는 티슈를 버리고, 다시 이사영의 얼굴을 감쌌다. 이번에는 두 손으로. 그의 엄지가 이사영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말랑하고, 뜨거웠다. 팩 때문에 자극받은 입술은 평소보다 예민했다. 이사영이 작게 움찔했다. 구일오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파?
구일오가 물었다. 이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기보다는, 화끈거렸다. 그리고 구일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데일 듯이 뜨거웠다. 구일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사영의 눈이 감겼다. 입술이 닿았다. 키스는 아니었다. 그저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구일오의 입술은 차가웠고, 이사영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 온도차가 선명했다. 구일오는 입술을 떼지 않고 웅얼거렸다.
딸기 냄새 나.
싸구려 향료 냄새였지만, 구일오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혀끝으로 이사영의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오일 맛과 딸기 향이 섞여 났다. 이사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구일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깊게. 아까의 치료가 의료 행위였다면, 지금은 확인 작업이었다. 이 입술이 내 것이라는 확인. 팩 따위가 아니라, 구일오의 것이라는.
키스는 길어졌다. 이사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뒷목을 받치고 더 깊이 몰아붙였다. 팩 때문에 부어오른 입술은 평소보다 더 감각적이었다. 맞닿는 면적이 넓어서인지, 아니면 예민해져서인지, 작은 자극에도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구일오의 손이 이사영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셔츠 너머로 구일오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가느다란 은실이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이사영의 입술은 아까보다 더 붉고, 더 부어 있었다. 구일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결과를 감상했다. 그는 엄지로 이사영의 젖은 입술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지 마. 떼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그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팩을 떼어주는 것도, 입술을 괴롭히는 것도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독점욕. 이사영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구일오는 피식 웃으며 이사영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탁자 위에 널브러진 분홍색 젤리 덩어리를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정확하게 골인했다.
밥이나 먹자. 입술 부어서 매운 건 못 먹겠네.
구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입술 팩 소동은 끝났지만, 이사영의 입술에 남은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구일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엌으로 가면서도, 자꾸만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이사영을 힐끔거렸다. 오늘 밤은, 팩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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