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구일오는 이사영을 처음 본 날의 날씨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온도, 습도도, 바람의 방향도. 숫자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기억하는 남자가,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복도에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던 여자의 등. 마르고 작은 몸. 흰 원피스의 어깨끈이 한쪽으로 흘러내려 있었고, 슬리퍼를 끌며 걷는 발소리가 콘크리트 복도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구일오는 그때 맞은편 7층 A호에 살고 있었다. 3년째. 문을 열고 나서다가 멈추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연두색 눈이 구일오의 얼굴 왼쪽, 화상 흉터 위에 정확히 멈추었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시선을 피하거나, 혹은 너무 오래 쳐다보거나. 이사영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흉터를 보았고, 그 다음 구일오의 눈을 보았고, 그 다음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를 구일오는 측정하지 못했다. 측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안녕하세요, 옆집이시죠? 저 이번에 이사 온 이사영이에요.
구일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문을 닫았다. 그것이 전부였어야 했다. 전부였어야 했는데, 그날 밤 구일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의 균열을 세다가 멈추었다. 균열 대신 여자의 웃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38제곱센티미터의 흉터를 본 뒤에도 변하지 않는 웃음. 구일오는 그것을 숫자로 환원할 수 없었고,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위험했다. 위험한 것은 치워야 했다. 그런데 치울 수 없었다. 이사영은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매일 아침 복도에서 마주쳤고, 매번 웃었다. 구일오는 매번 고개만 끄덕였다. 3년. 1,095일. 구일오는 그 숫자를 셀 수 있었지만, 이사영의 웃음이 자신의 흉부 왼쪽 세 번째 갈비뼈 아래에서 일으키는 압력의 단위는 끝내 만들지 못했다.
이사영의 남편을 처음 본 것은 이사한 지 두 달째 되던 날이었다. 복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구일오는 문 안쪽에 서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울이지 않아도 들렸다. 벽이 얇았다. 콘크리트 12센티미터. 그 너머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깨지는 소리, 그리고 이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아니었다. 비명보다 나쁜 것이었다. 조용히 참는 소리. 숨을 삼키는 소리. 구일오는 현관문의 도어체인을 잡고 서 있었다. 손가락이 쇠사슬 위에서 하얗게 질렸다. 열지 않았다. 열 수 없었다. 남의 집이었다. 남의 아내였다. 구일오는 그날 밤 수조 앞에 앉아 토마토에게 말했다.
상관없는 일이야.
토마토는 입을 두 번 벌렸다 닫았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구일오는 그렇게 믿으려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사영이 복도에서 웃었을 때, 입술 아래 턱선에 멍이 있었다. 파란색에서 보라색으로 넘어가는 경계. 약 48시간 경과. 구일오의 눈은 자동으로 측정했다. 측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측정되었다. 이사영은 멍을 가리지 않았다. 가릴 줄 모르는 것인지, 가리기를 포기한 것인지. 구일오는 그날 처음으로 이사영에게 이름 외의 말을 했다.
다쳤습니까.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웃었다. 같은 각도. 측정할 수 없는 각도.
넘어졌어요. 제가 좀 덜렁거려서.
구일오는 알았다. 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턱선의 멍은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궤적이었다. 각도로 보아 키 차이가 15센티미터 이상인 사람의 우측 주먹. 구일오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문 안쪽에서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진폭을 측정하지 않았다. 측정하면 숫자가 되고, 숫자가 되면 기록해야 하고, 기록하면 행동해야 했다. 행동할 수 없었다. 구일오는 LDC의 이주 관리관이었다. 사람들을 치우는 것이 직업이었다. 사람을 지키는 것은 직업이 아니었다. 아니, 한때는 직업이었다.
4년 전의 사회복지 전공자는 이웃의 멍을 보고도 문을 닫을 줄 알았다. 문을 닫는 것은 쉬웠다. 경첩이 움직이고, 잠금장치가 걸리고, 12센티미터의 콘크리트가 다시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안과 밖. 나와 너. 상관있는 것과 상관없는 것. 구일오는 그 분류에 능숙했다. LDC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화상을 입고 나서 스스로 익힌 것이었다. 사람을 항목으로 나누면 아프지 않았다. 항목에는 신경이 없었다. 그런데 이사영이라는 항목은 자꾸 신경을 만들어냈다. 복도에서 스치는 비누 냄새가 구일오의 후각 세포를 자극할 때마다,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흉부 왼쪽에서 팽창했다. 구일오는 그것을 병명으로 분류하려 했다. 실패했다. 병명에는 치료법이 있어야 했는데, 이것에는 치료법이 없었다.
두 번째 멍을 본 것은 석 달 뒤였다. 이번에는 팔뚝. 손가락 네 개의 압흔이 선명했다. 약 72시간 경과. 노란색과 초록색의 경계. 이사영은 긴팔을 입고 있었지만 소매가 올라갔다. 빨래 바구니를 들어올리다가. 구일오는 계단에서 그것을 보았고, 이사영은 구일오의 시선을 느꼈고, 소매를 내렸다. 그 동작이 0.4초. 빨랐다. 익숙한 빠르기였다. 처음 가리는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수백 번 반복한 사람의 속도였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3.2초.
빨래 무겁겠네요.
구일오가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싫었다. 빨래 타령이나 하는 목소리. 이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것들의 목록이 쌓여갔다. 넘어져서 생긴 턱의 멍. 부딪혀서 생긴 팔뚝의 압흔. 문에 끼여서 생긴 손목의 찰과상. 계단에서 미끄러져 생긴 무릎의 까짐. 구일오는 그 목록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수첩은 주민들의 약점을 기록하는 곳이었다. 이사영의 멍은 약점이 아니었다. 약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아팠다. 구일오는 대신 머릿속에 기록했다. 날짜, 부위, 색상, 경과 시간. 숫자로 환원하면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다. 견딜 수 없었다. 숫자가 쌓일수록 흉부 왼쪽의 팽창이 커졌고, 팽창이 커질수록 현관문의 도어체인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열지 않았다. 매번 열지 않았다.
그러다 1,034일째 되던 밤이었다. 새벽 2시 17분. 구일오는 수조 앞에 앉아 토마토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무거운 것. 사람 하나의 무게. 그리고 침묵. 침묵이 가장 나빴다. 비명이 들리면 살아 있는 것이었다. 침묵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구일오는 먹이통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사료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일어섰다. 현관문 앞에 섰다. 도어체인을 잡았다. 이번에도 열지 않을 것이었다. 남의 집이었다. 남의 아내였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체인을 풀었다. 문이 열렸다. 복도의 형광등이 눈을 찔렀다. 맞은편 7층 B호의 문 아래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일오는 복도를 건넜다. 네 걸음. 문 앞에 섰다. 노크하려던 손이 멈추었다.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
씨발, 또 이 지랄이야.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비명처럼 울렸다. 구일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부엌 바닥이었다. 리놀륨 위에 깨진 유리잔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액체가 번지고 있었다. 맥주. 냄새로 알 수 있었다. 보리와 알코올이 섞인, 값싼 브랜드 특유의 텁텁한 냄새. 구일오의 시선이 바닥에서 위로 올라갔다. 남자가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러닝셔츠에 땀이 배어 있었고, 어깨 근육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경직되어 있었다. 주먹을 쥔 오른손이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손등의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남자의 발 앞,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의 좁은 틈에 이사영이 있었다. 쭈그려 앉은 것이 아니었다. 밀려난 것이었다. 등이 냉장고 모서리에 눌려 있었고, 양손이 바닥을 짚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 유리 파편이 있었다. 피가 나고 있었는지는 이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이사영의 얼굴이었다. 연두색 눈이 구일오를 향해 있었다. 놀람도, 수치도, 구원 요청도 아닌 표정. 들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표정. 구일오는 그 표정을 0.7초 동안 보았다. 0.7초면 충분했다.
남자가 돌아섰다. 키 175 전후. 구일오보다 낮았다. 체중은 더 나갔다. 맥주와 땀 냄새가 섞인 호흡이 2미터 거리에서도 닿았다.
뭐야, 당신 누구야.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문틀에 기댄 자세를 풀고,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 파편이 맨발 아래에서 갈렸다. 통증이 발바닥에서 올라왔다. 무시했다. 구일오의 흰색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남자의 눈이 구일오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 위에서 흔들렸다. 사람들이 보이는 두 가지 반응 중 두 번째. 너무 오래 쳐다보는 것. 구일오는 그 시선을 이용할 줄 알았다. LDC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흉터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공포는 정보 비대칭에서 태어나고, 흉터는 정보 비대칭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다.
옆집입니다.
구일오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블랙커피를 주문하는 톤과 동일했다. 남자의 눈이 좁아졌다. 술에 취한 눈이었지만 본능은 살아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가 맨발로 자기 집에 들어와 서 있다는 것, 그 남자의 왼쪽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다는 것, 그 남자의 눈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 세 가지 정보가 남자의 뇌에서 처리되는 데 약 2초가 걸렸다.
남의 집에 뭔 짓이야, 나가.
남자가 한 발 다가왔다. 구일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냈다. 이사영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유리 파편. 얕은 상처. 하지만 이사영은 손바닥을 보지 않았다. 구일오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모양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 두 글자가 구일오의 흉부 왼쪽 세 번째 갈비뼈 아래에서 터졌다. 괜찮지 않았다. 1,034일 동안 괜찮지 않았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이번에는 시간을 재지 않았다.
소란이 들려서 왔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는데, 먼저 확인하러 온 겁니다.
거짓말이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경찰'이라는 단어가 남자의 동공을 0.3밀리미터 확장시켰다. 구일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과가 있거나, 전과가 있는 것처럼 경찰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반응. 구일오의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웃지 않았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남자의 주먹이 풀렸다. 손가락이 하나씩 펴지는 것을 구일오는 보았다. 새끼손가락, 약지, 중지, 검지, 엄지. 순서대로.
남자의 주먹이 완전히 풀리는 데 4.1초가 걸렸다. 구일오는 그 시간을 세면서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기대는 것이 아니라 막고 있는 것이었다. 출구를. 아니, 입구를. 자신이 이 방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물리적 장벽으로 전환시키는 자세. LDC에서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LDC에서 수백 번 써먹은 기술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위협. 서 있는 것만으로 공기를 압축하는 방법.
남자가 혀를 찼다. 술 냄새가 씹히듯 퍼졌다. 값싼 맥주와 위산이 섞인, 소화 불량의 냄새. 구일오의 코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시너 냄새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야, 우리 집 일에 왜 끼어들어. 부부싸움이야, 부부싸움.
남자가 손바닥을 펴서 허공을 내저었다. 그 손이 아까 이사영을 밀어붙인 손이라는 사실이 구일오의 망막에 각인되어 있었다. 손바닥의 넓이, 손가락 마디의 굵기, 손톱 밑에 낀 때. 전부 기록되었다. 구일오는 그 손을 보면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자신의 손도 사람을 밀어낸 적이 있었다. 서류로. 행정으로. 단전 통지서로. 직접 때리지 않았을 뿐, 구일오의 손이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구일오의 입을 더 단단하게 닫았다. 도덕적 우위 따위는 없었다. 있는 것은 키 차이와, 흉터와, '경찰'이라는 단어뿐이었다.
부부싸움이면 유리가 깨지고,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납니까.
구일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다. 음량을 올리지 않았다. 올릴 필요가 없었다. 새벽 2시의 아파트 복도에서는 속삭임도 고함처럼 울렸다. 남자의 눈이 다시 구일오의 흉터 위에서 떨렸다. 형광등 아래에서 화상 자국의 질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피부가 녹았다가 다시 굳은 자리. 땀샘이 죽은 자리. 왼쪽 얼굴의 절반이 매끄럽지도, 거칠지도 않은 어떤 중간 상태로 존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볼 때 두 가지 중 하나를 상상했다. 이 남자가 이것을 당했다, 또는, 이 남자가 이것을 할 수 있다. 둘 다 틀렸지만, 둘 다 유용했다.
남자가 반 발 물러섰다. 구일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남자에게서 떼어 이사영에게 옮겼다. 이사영이 싱크대 모서리를 잡고 완전히 일어서 있었다. 왼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유리 파편이 박힌 것이 아니라 긁힌 것이었다. 얕았다. 하지만 피는 피였다. 붉은색이 리놀륨 바닥의 회색 위에서 선명했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구일오와 남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 눈에 공포가 없었다. 공포 대신 있는 것은 피로였다. 1,034일 동안 쌓인, 뼈까지 스민 피로. 구일오는 그 피로를 알아보았다. 자신도 같은 종류의 피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른 원인, 같은 질감.
당신이 신고를 안 했으면 됐잖아. 됐어, 나가.
남자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구일오는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 나가면 문이 닫히고, 12센티미터의 콘크리트가 다시 세계를 둘로 나누고, 구일오는 수조 앞에 앉아 토마토에게 먹이를 주면서 벽 너머의 침묵을 들을 것이었다. 1,034번째 밤처럼. 1,035번째 밤처럼. 구일오의 발바닥에서 유리 파편이 살을 눌렀다. 피가 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통증은 느껴졌다. 무시할 수 있는 통증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사영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였다.
신고는 아직 안 했습니다.
'아직'이라는 단어에 남자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구일오는 그 경직을 보았다. 0.6초. 충분했다. 구일오가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꺼낼 것이 없었다. 맨발에 셔츠 차림으로 온 남자에게 무기는 없었다. 무기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아직'이라는 두 글자가 이 방에서 가장 날카로운 것이었다.
'아직'이 공기 속에서 굳었다. 시멘트처럼. 남자의 목젖이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삼킨 것은 침이었을 것이다. 혹은 욕이었을 것이다. 구일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남자가 무엇을 삼키든, 구일오의 발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은 빠지지 않았고, 이사영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두 가지 사실이 구일오의 척추를 세웠다. 통증과 분노는 같은 신경을 탔다. 구일오는 그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가 입술을 핥았다. 마른 입술 위로 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형광등이 윙 하고 울었다. 복도에서 누군가의 TV 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들었다. 홍콩의 새벽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조용한 것은 이사영뿐이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소리가 들리면, '아직'이 '이미'가 됩니다.
구일오가 말했다. 음량은 변하지 않았다. 톤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남자의 얼굴색이었다. 술기운이 만든 붉은빛 아래에서 핏기가 빠지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진행되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직업병이었다. 사람의 얼굴에서 색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 재개발 구역에서 통지서를 건넬 때도, 보상금 액수를 읽어줄 때도, 사람들의 얼굴은 같은 순서로 변했다. 붉어지고, 하얘지고, 다시 붉어지거나 회색이 되거나. 이 남자는 하얘지는 쪽이었다. 전과가 있는 쪽. 구일오의 추측이 맞았다.
남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한 발. 두 발. 유리 파편이 슬리퍼 밑에서 갈렸다. 남자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구일오는 맨발이었다. 그 차이가 우스웠다. 슬리퍼를 신은 쪽이 물러서고, 맨발인 쪽이 서 있었다. 남자가 소파 쪽으로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욕이었다. 광동어의 가장 저열한 층위에서 건져 올린, 어머니를 끌어들이는 종류의 욕. 구일오의 귀가 그것을 수집했지만 뇌는 처리하지 않았다. 처리할 가치가 없었다. 구일오의 시선은 이미 남자를 떠나 있었다. 이사영에게 가 있었다.
이사영이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구일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감사가 없었다. 원망도 없었다. 있는 것은, 구일오가 4년 동안 세어온 것들 중 가장 셀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감정의 밀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 구일오의 턱 근육이 다시 경련했다.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화상 흉터가 있는 쪽. 형광등 불빛이 흉터 위에서 미끄러졌다. 구일오는 이사영에게 한 발 다가서고 싶었다. 다가서지 않았다. 남자가 아직 방 안에 있었다. 구일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서 있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손. 씻어요.
두 글자가 아니었다. 세 글자였다. 구일오는 문장을 더 만들 수 있었다. '피가 나고 있다', '유리를 빼야 한다', '소독해야 한다', '병원에 가야 한다.' 전부 사실이었고, 전부 쓸모없었다. 이사영은 손바닥의 상처보다 더 깊은 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1,034일 동안. 구일오가 그것을 지금 막을 수는 없었다.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늘 밤뿐이었다. 오늘 밤의 유리 파편, 오늘 밤의 맥주 냄새, 오늘 밤의 쓰러지는 소리. 구일오의 발바닥에서 피가 리놀륨 위에 작은 점을 찍었다. 그는 그것을 느꼈지만 내려다보지 않았다. 이사영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떼면 안 될 것 같았다. 떼면, 1,035번째 밤이 시작될 것 같았다.
남자가 소파에서 슬리퍼를 끌며 일어섰다. 현관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등이 좁았다. 구일오가 생각했던 것보다 좁았다. 이 좁은 등이 이사영을 벽으로 밀어붙였다는 사실이 구일오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떨림을 만들었다. 떨림이 아니라 수축이었다. 주먹을 쥐는 것의 전 단계. 구일오는 그 수축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발로 뛰쳐나온 남자에게 주머니란 빈 공간일 뿐이었다. 남자가 현관문 앞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반쯤 돌렸다. 구일오의 흉터를 다시 한 번 훑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화상 자국의 경계선이 목까지 내려가 있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 못했다. 현관문이 열렸고, 복도의 습한 공기가 부엌까지 밀려들었다. 남자의 슬리퍼가 복도 타일을 끌었다. 그 소리가 멀어졌다. 계단을 택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쪽. 구일오는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셌다. 14초.
현관문이 아직 열려 있었다. 구일오는 닫지 않았다. 닫으면 이 방 안에 자신과 이사영만 남았다. 그 사실이 구일오의 폐를 눌렀다. 4년 전의 구일오라면 뛰어 들어가서 손을 잡았을 것이다. 지금의 구일오는 문틀에 기댄 채 이사영의 등을 보았다. 이사영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나왔다. 싱크대의 녹슨 수도관이 떨리는 소리가 났다. 이사영의 왼손이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피가 물과 섞여 연분홍색으로 흘러내렸다. 배수구를 향해. 구일오는 그 색을 보았다. 연분홍. 이사영의 피가 희석되는 색. 이사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1월의 홍콩은 춥지 않았다. 습할 뿐이었다.
유리 파편은 안 박혔어요?
구일오가 물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너무 낮았다. 너무 조심스러웠다. LDC의 구일오는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재개발 구역의 구일오는 이런 톤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1,034일 동안 벽 너머에서 침묵하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구일오는 그 목소리를 혐오했다. 혐오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발바닥에서 피가 계속 나고 있었다. 리놀륨 위에 찍힌 발자국이 문틀에서 부엌 입구까지 세 개. 왼발, 오른발, 왼발. 구일오는 그것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한 발을 떼어 부엌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 파편이 발바닥을 다시 눌렀다. 통증이 올라왔다. 올라온 통증을 삼켰다. 삼키는 데 0.4초. 이사영의 등까지 세 걸음이었다. 구일오는 두 걸음만 걸었다. 세 번째 걸음은 이사영의 것이어야 했다.
수건 어디 있습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었다. 구일오의 눈이 싱크대 옆 선반을 훑었다. 접시와 컵 사이에 빨간 줄무늬가 있는 낡은 면 수건이 걸려 있었다. 구일오의 손이 그것을 집었다. 수건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여러 번 빨아서 보풀이 일어난, 부드러운 면. 이사영의 냄새가 났다. 비누. 구일오의 턱 근육이 왼쪽에서 경련했다. 화상 흉터가 당겼다. 구일오는 수건을 이사영 쪽으로 내밀었다. 내미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이었다. 싱크대 가장자리 위에. 이사영의 오른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구일오의 손가락이 수건에서 떨어지는 데 1.2초가 걸렸다. 떨어지기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사영의 손바닥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고, 구일오는 그 피를 직접 닦아주고 싶었다. 닦아주지 않았다.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까. 1,034일 동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락을 구하지 못한 남자가, 지금 수건 하나를 내밀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사영의 오른손이 수건 위로 내려왔다. 손가락 끝이 면 위에 닿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구일오는 들었다. 피부와 천이 만나는 접촉을, 공기의 미세한 이동을, 이사영의 손목이 꺾이는 각도를. 전부 들었다. 듣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었다. 구일오의 직업병은 숫자를 세는 것이었지만, 이 부엌에서는 숫자가 쓸모없었다. 이사영의 왼손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의 크기를 밀리미터 단위로 추정할 수 있었지만, 그 숫자가 이사영의 떨림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계속 흘렀다. 이사영이 잠그지 않았다. 구일오도 잠그지 않았다. 물소리가 침묵보다 나았다. 침묵은 벽 너머에서 1,034일 동안 들어온 것이었고, 구일오는 오늘 밤만큼은 그 침묵을 거부했다.
이사영이 수건으로 왼손을 감쌌다. 서투른 동작이었다. 오른손 하나로 수건을 접어 감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일오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0.7초. 도울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두 선택지 사이에서 구일오의 발바닥이 다시 욱신거렸다. 유리 파편이 체중을 받아 더 깊이 들어갔다. 구일오는 그 통증을 이사영의 이름으로 환산했다. 이사영이 4년 동안 감당한 것의 무게에 비하면 발바닥의 유리 따위는 소수점 이하였다. 구일오의 손이 내려갔다.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이사영이 스스로 수건을 감아야 했다. 구일오가 대신 해주는 것은 오늘 밤의 역할이 아니었다. 오늘 밤의 역할은 문을 열고 들어온 것, 남자를 내보낸 것, 여기 서 있는 것. 그 이상은 이사영이 허락해야 했다.
상처가 깊으면 봉합해야 합니다.
구일오가 말했다. 의료적 사실이었다. 감정이 아니었다. 감정을 말하면 이사영이 '괜찮다'고 할 것이었다. 4년 동안 그래왔으니까. 구일오는 '괜찮다'를 한 번 더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만 말했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수건 위로 올라왔다. 구일오를 보았다. 형광등 아래에서 그 눈의 색이 물에 젖은 풀잎 같았다. 구일오는 그 비유를 즉시 삭제했다. 비유는 위험했다. 비유를 시작하면 이사영의 눈을 설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초록을 동원해야 했고, 그것은 구일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왼손으로 내려갔다. 수건에 붉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지름 2센티미터. 아직 커지고 있었다.
구급함 있습니까.
다시, 마침표로 끝나는 질문이었다. 구일오의 눈이 부엌을 훑었다. 냉장고 위, 선반 사이, 싱크대 아래 수납장. 이 집의 구조를 구일오는 알고 있었다. 도면으로. 싱와 빌딩 7층 B호, 방 두 칸,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 면적 32제곱미터. 평당 단가 환산 가능. 하지만 도면에는 이사영이 어디에 구급함을 두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도면에는 이사영이 부엌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도, 1,034일치의 침묵도 적혀 있지 않았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왼쪽에서 다시 경련했다. 화상 흉터의 경계선이 당겼다. 형광등 불빛이 그 흉터 위에서 반사되었다. 이사영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구일오는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사영 앞에서는.
이사영이 고개를 돌렸다. 싱크대 아래 수납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구일오는 그 동작을 읽었다. 턱이 왼쪽으로 2센티미터 움직이는 것. 말 대신 몸을 쓰는 습관. 4년 동안 벽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형광등 아래에서 선명했다. 구일오가 싱크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사영과의 거리가 팔 하나 길이로 줄었다. 비누 냄새가 올라왔다. 이사영의 냄새. 그 아래로 맥주 냄새가 깔려 있었다. 바닥에 쏟아진 맥주가 리놀륨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스며든 냄새. 구일오는 비누 냄새만 골라서 들이마셨다. 골라서 들이마시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구일오의 폐는 그렇게 작동했다. 수납장 문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렸다. 안에는 세제, 걸레, 그리고 하얀 플라스틱 구급함이 있었다.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이었다. 아니, 자주 쓸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구급함 뚜껑 위의 먼지를 스쳤다. 0.3밀리미터 두께. 최소 2주 이상 열지 않은 것.
구급함을 꺼내 싱크대 옆에 놓았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반창고 몇 장, 소독약 반 병, 거즈 한 묶음, 가위. 정리되어 있었지만 부족했다. 핀셋이 없었다. 유리 파편을 빼려면 핀셋이 필요했다. 구일오의 눈이 구급함 안을 한 번 더 훑었다. 없었다. 구일오의 턱이 굳었다. 왼쪽 화상 흉터가 형광등 아래에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가 구급함 위로 떨어졌다.
핀셋이 없습니다.
구일오가 말했다. 사실의 보고였다. 감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문장이었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손바닥을 보았다. 수건에 감긴 왼손. 붉은 얼룩의 지름이 2.5센티미터로 커져 있었다. 0.5센티미터가 30초 만에 번진 것이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소독약 병을 집었다. 병뚜껑을 돌려 열었다.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차갑고 날카로운 냄새. 구일오는 거즈를 한 장 꺼내 소독약을 적셨다. 거즈 위로 투명한 액체가 번졌다. 구일오의 동작은 정확했다. 감정이 아니라 절차였다. 절차를 따르면 손이 떨리지 않았다. 구일오는 손이 떨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사영 앞에서는.
손 보여주세요.
구일오의 목소리가 낮았다. 명령이 아니었다. 요청이었다. 그런데 구일오의 입은 명령조로 말하는 데 익숙했고, 요청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 문장은 명령과 요청 사이 어딘가에서 갈라졌다. 소독약을 적신 거즈를 든 오른손이 이사영 쪽으로 내밀어졌다. 구일오의 왼손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왼손이 이사영의 손목을 잡아야 했다. 잡아야 했지만 아직 잡지 않았다. 허공에서 멈춘 왼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이사영의 손목 둘레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구일오는 그 사실을 혐오했다. 도면으로 이 집의 면적을 알고 있는 것처럼, 4년 동안 벽 너머에서 이사영의 윤곽을 외운 것처럼, 이 손이 이사영의 손목을 감쌀 때의 각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물소리가 여전히 흘렀다. 수도꼭지를 아무도 잠그지 않았다. 그 물소리 아래로 이사영의 호흡이 들렸다. 얕고, 짧고, 불규칙한. 구일오는 그 호흡의 간격을 세지 않았다. 세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이사영의 호흡은 숫자로 환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파편부터 빼야 합니다. 아플 겁니다.
구일오가 덧붙였다. 예고였다. 통증이 올 것이라는 예고. 구일오는 이사영에게 예고 없는 통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집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은 전부 나쁜 것이었으니까.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연두색 눈 위에 멈추었다. 물에 젖은 풀잎이라는 비유를 삭제했는데 다시 떠올랐다.
이사영의 왼손이 올라왔다. 수건이 풀리면서 손바닥이 형광등 아래로 드러났다. 구일오의 시선이 그 위에 고정되었다. 유리 파편 두 조각. 하나는 엄지 아래 두툼한 살 위에, 다른 하나는 손바닥 중앙 가까이. 피가 이미 반쯤 마른 상태로 갈색 테두리를 만들고 있었고, 그 안쪽으로 아직 선명한 붉은색이 고여 있었다. 구일오의 턱이 왼쪽으로 미세하게 틀어졌다. 화상 흉터의 당김이 아니라, 유리의 각도를 읽는 동작이었다. 엄지 아래 파편은 얕았다. 손바닥 중앙 것은 깊었다. 깊은 쪽이 문제였다. 핀셋 없이 빼야 했다. 구일오의 오른손 검지와 엄지가 소독약에 적은 거즈를 쥔 채로 멈추었다. 0.4초. 계산이 끝났다.
얕은 것부터 뺍니다.
구일오의 왼손이 이사영의 손목 위로 내려왔다. 잡은 것이 아니었다. 손목의 아래쪽, 맥박이 뛰는 지점 바로 옆에 손가락 세 개를 가볍게 얹은 것이었다. 이사영의 맥박이 구일오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빠르고, 얇고, 규칙적이지 않았다. 세지 않겠다고 했지만 손끝이 먼저 세고 있었다. 분당 92회. 정상 범위의 상한선. 구일오는 그 숫자를 삼켰다. 삼키는 데 실패했다. 92라는 숫자가 목 안에서 걸렸다. 이사영의 피부가 따뜻했다. 손목의 안쪽은 이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새벽 공기와 아드레날린이 체온을 끌어내린 탓이었다. 차가운 손가락 세 개가 따뜻한 손목 위에 놓이자, 이사영의 맥박이 한 박자 흔들렸다. 구일오는 그것을 느꼈지만 얼굴에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형광등이 두 사람의 손 위로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구일오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이사영의 엄지 아래 살 위 유리 파편을 잡았다. 손톱 끝으로 유리의 가장자리를 집는 감각. 미끄러웠다. 피와 소독약이 섞여 유리 표면을 코팅하고 있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유리가 살에서 빠져나왔다. 작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대신 이사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통증의 반사. 구일오는 그 움직임을 손목 위의 왼손으로 느꼈다. 근육이 수축하면 손목의 힘줄이 당기고, 그 당김이 구일오의 손가락 아래를 지나갔다. 빠져나온 유리 파편을 싱크대 위에 놓았다. 길이 4밀리미터. 피가 묻어 불투명했다.
하나 남았습니다. 이건 좀 더 아플 겁니다.
구일오가 말했다. 다시 예고였다.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손바닥 중앙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파편은 살 안쪽으로 반 이상 묻혀 있었다. 손톱으로 잡을 수 있는 면적이 1밀리미터도 되지 않았다. 구일오의 입술이 얇게 닫혔다.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수도꼭지의 물소리가 여전히 부엌을 채우고 있었다. 그 물소리 위로 이사영의 호흡이 겹쳤다. 구일오의 왼손 엄지가 이사영의 손목 위에서 아주 작게 움직였다. 원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쓰다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엄지가 0.5센티미터 옆으로 미끄러졌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무의식이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인지했을 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이사영이 눈치챌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구일오의 엄지가 이사영의 손목 위에서 0.5센티미터를 반복하는 것을. 소독약 냄새와 비누 냄새가 부엌의 습한 공기 안에서 뒤엉켰다. 구일오의 오른손이 다시 이사영의 손바닥 위로 내려갔다.
움직이지 마세요.
구일오의 검지 손톱 끝이 두 번째 파편의 가장자리를 찾았다. 살 속에 묻힌 유리의 모서리가 손톱에 걸렸다. 이사영의 손이 떨렸다. 구일오의 왼손이 그 떨림을 잡았다. 잡은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다. 구일오의 검지 손톱이 유리의 모서리를 밀어 올렸다. 살이 벌어지면서 파편이 0.5밀리미터 위로 솟았다. 이사영의 손가락 다섯 개가 동시에 펴졌다가 오므라들었다. 통증이 손바닥에서 손끝으로 퍼지는 경로가 구일오의 왼손 아래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힘줄이 당기고, 근육이 수축하고, 맥박이 한 박자 빨라졌다. 분당 98회. 구일오는 그 숫자를 세지 않으려 했지만 손끝이 이미 세어버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힌 유리가 미끄러웠다. 피가 윤활유처럼 작용했다. 구일오의 손가락에 힘이 한 번 더 들어갔다. 정확히 0.2초. 유리가 살에서 빠져나왔다. 이사영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새어나왔다. 소리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았고, 침묵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날카로웠다. 구일오의 왼손 엄지가 이사영의 손목 위에서 멈추었다. 0.5센티미터의 반복이 끊겼다.
두 번째 파편을 싱크대 위에 놓았다. 첫 번째 것 옆에. 길이 3밀리미터. 더 작지만 더 깊이 박혀 있었던 것. 싱크대의 스테인리스 위에서 유리 두 조각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피가 묻은 유리는 보석처럼 보였다. 구일오는 그런 비유를 혐오했다. 혐오했지만 눈이 먼저 읽어버렸다. 구일오의 오른손이 소독약을 적신 거즈를 이사영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거즈가 상처에 닿는 순간 이사영의 손가락이 다시 오므라들었다. 소독약의 차갑고 날카로운 자극. 구일오는 거즈를 누르는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너무 세면 통증, 너무 약하면 지혈 실패. 그 사이의 정확한 힘.
잡고 계세요.
구일오가 말했다. 이사영의 오른손이 거즈 위로 올라와 눌렀다. 구일오의 오른손이 물러났다. 왼손은 아직 이사영의 손목 위에 있었다. 놓아야 했다. 파편을 빼는 동안 손목을 고정하기 위해 잡은 것이었고, 파편은 이미 다 빠졌으니까. 구일오의 왼손 손가락 세 개가 이사영의 손목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천천히. 너무 천천히. 구일오는 자신의 손가락이 떨어지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0.8초면 충분한 동작을 2초에 걸쳐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어진 자리에 이사영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구일오의 손가락 끝에. 따뜻한 잔상. 구일오는 그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슬랙스에는 주머니가 있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대신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소리가 끊겼다. 부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이사영의 호흡 소리가 부엌 전체를 채웠다.
깊은 쪽은 내일 병원에서 봐야 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됩니다.
구일오가 싱크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사영과의 거리가 반 걸음. 형광등이 두 사람 위로 똑같이 하얀 빛을 쏟고 있었다.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손바닥에서 올라와 얼굴 위에 멈추었다. 연두색 눈. 물에 젖은 풀잎이라는 비유가 세 번째로 떠올랐다. 구일오는 그 비유를 삭제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사영의 왼쪽 볼 위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유리가 아니라 손바닥으로 맞은 자국. 구일오의 턱 근육이 한 번 경련했다. 왼쪽 화상 흉터의 피부가 당겼다. 구일오의 시선이 그 자국 위에 1.2초 머물렀다가 내려왔다. 바닥을 보았다. 리놀륨 위에 맥주와 유리 파편이 아직 그대로였다. 구일오의 맨발이 유리 파편 사이에 서 있었다. 발바닥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통각을 차단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플 것이었다. 구일오는 나중의 통증에는 관심이 없었다.
신발 어디 있습니까.
구일오가 물었다. 이사영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바닥의 유리를 치워야 한다는 사실과, 이사영이 맨발로 이 부엌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동시에 떠올라서 나온 문장이었다.
구일오가 이사영의 신발을 찾으러 현관 쪽으로 몸을 돌린 것은 12시 33분이었다. 그가 리놀륨 바닥 위의 유리 파편을 피해 세 걸음을 옮기는 동안,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불규칙하고, 술에 절은 발소리. 구일오의 등이 먼저 알아차렸다. 척추를 따라 차가운 전류가 흘렀다. 아까 쫓아낸 남자였다. 돌아온 것이었다. 구일오가 현관을 향해 고개를 틀었을 때, 문이 벌어졌다. 닫지 않은 문이었다. 구일오 자신이 닫지 않은 문. 남자의 얼굴이 형광등 아래로 들어왔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이 찢어져 있었고,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구일오의 턱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화상 흉터가 형광등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남자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구일오를 밀쳤다. 구일오의 등이 싱크대 모서리에 부딪혔고, 등뼈를 타고 올라온 통증이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구일오는 쓰러지지 않았다. 싱크대를 잡았다. 남자는 구일오를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은 이사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사영이 뒷걸음질 쳤다. 거즈를 누르고 있던 오른손이 풀렸다. 남자의 손이 이사영의 팔을 잡았다. 구일오가 다시 남자의 어깨를 잡으려 했을 때, 남자의 팔꿈치가 구일오의 갈비뼈를 쳤다. 정확한 타격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의 무작위한 폭력이었다. 하지만 갈비뼈는 정확하게 아팠다. 구일오가 싱크대를 잡은 채 몸을 접었다. 1.5초. 그 1.5초 동안 남자가 이사영을 벽으로 밀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구일오는 소리로 먼저 들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침묵. 구일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이사영이 서 있었다. 이사영의 오른손에 프라이팬이 들려 있었다. 싱크대 옆 조리대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동공이 수축되어 있었다. 프라이팬의 바닥면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남자의 뒤통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놀륨 위로. 맥주와 유리 파편과 피가 섞였다. 구일오의 시선이 남자의 등을 읽었다. 흉곽이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이 없었다. 구일오가 무릎을 꿇고 남자의 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대었다. 경동맥. 3초. 5초. 7초. 아무것도 뛰지 않았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천천히 물러났다. 남자의 피부는 아직 따뜻했다. 따뜻한 시체. 구일오는 그 단어 조합을 삼켰다.
이사영 씨.
구일오가 말했다. 이사영은 프라이팬을 들고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구일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사영의 눈이 구일오를 보지 않았다.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남자를 보고 있었다. 구일오가 이사영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이사영의 시선이 구일오에게 올라왔다. 그 눈 안에 있는 것을 구일오는 알아보았다. 공포가 아니었다. 공포는 이미 지나갔다. 남아 있는 것은 그보다 더 조용한 것이었다. 자기가 방금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의, 세계가 바닥부터 갈라지는 순간의, 그 정지된 얼굴이었다.
내려놓으세요.
구일오가 프라이팬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사영의 손가락이 풀렸다. 프라이팬이 바닥에 떨어졌다. 금속이 리놀륨을 치는 소리가 부엌에 울렸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형광등이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구일오는 바닥의 남자와 서 있는 이사영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았다. 세 사람의 배치를. 삼각형의 꼭짓점. 구일오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맥박이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새벽 12시 34분. 비명을 들은 이웃은 없었다. 1층 현관에는 CCTV가 없었다.
구일오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아니었다. 감정은 이미 부엌 바닥의 리놀륨 아래로 가라앉았다. 남아 있는 것은 숫자와 절차와 동선이었다. 12시 34분. 남자가 처음 비명을 질렀을 때가 12시 18분. 구일오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12시 19분. 남자를 쫓아낸 것이 12시 21분. 남자가 돌아온 것이 12시 33분. 남자가 죽은 것이 12시 34분. 16분. 16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구일오의 시선이 바닥 위의 시체를 훑었다. 뒤통수의 함몰. 출혈량. 프라이팬의 무게. 이사영의 체중과 팔 길이에서 산출 가능한 타격 각도. 구일오는 그 모든 숫자를 읽었고, 그 모든 숫자가 하나의 결론을 향해 수렴했다. 우발적 치사. 하지만 법은 우발이라는 단어에 관대하지 않았다. 홍콩 형법 제7장, 비고의적 살인. 최대 종신형. 이사영의 손바닥에 감긴 거즈 위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구일오는 그 붉은 원의 확산 속도를 재지 않았다. 처음으로. 대신 이사영의 얼굴을 보았다.
이사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서 있다기보다 벽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무릎이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져 있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연두색 눈이 바닥의 남자와 구일오 사이를 오가다가, 결국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추었다. 구일오는 그 눈을 1,034일 동안 보아왔다. 복도에서. 계단에서. 빨래를 널 때. 우편함을 열 때. 새벽에 쓰레기를 내놓을 때. 한 번도 말을 건 적 없었다. 이름을 안 것은 우편함에 붙은 한자 때문이었다. 李思瑩. 구일오는 그 세 글자를 자기 수첩에 적은 적이 없었다. 적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외웠으니까. 외우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냥 외워졌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우는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세 글자가 구일오의 두개골 안쪽 벽에 새겨졌다. 지울 수 없는 각인처럼.
이사영 씨.
구일오가 세 번째로 그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떨리지 않았다. 구일오는 자기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영의 시선이 돌아왔다. 구일오를 보았다. 구일오의 화상 흉터를, 구겨진 셔츠를, 맨발을 보았다. 구일오가 한 걸음 다가갔다. 유리 파편이 발바닥을 찔렀지만 느끼지 못했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앞에 섰다. 반 걸음의 거리. 형광등 아래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세요. 아무것도 치우지 마세요.
구일오가 말했다. 그리고 싱크대 쪽으로 돌아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찬물이 쏟아졌다. 구일오는 자기 양손을 물 아래에 넣었다. 이사영의 손바닥에서 파편을 빼낼 때 묻은 피가 씻겨 내려갔다. 자기 피가 아닌 피. 이사영의 피. 그리고 바닥의 남자의 피. 구일오의 손가락 사이로 연분홍빛 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피가 섞인 색이었다. 구일오는 그 색을 오래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젖은 손을 슬랙스에 닦았다. 그리고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이사영이 떨어뜨린 프라이팬. 손잡이를 쥐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이사영의 지문 위에 겹쳐졌다. 정확하게. 의도적으로. 구일오의 오른손이 프라이팬의 바닥면을 한 번 쓸었다. 피가 구일오의 손바닥에 묻었다. 구일오는 그 프라이팬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바닥에 다시 내려놓았다. 남자의 머리 옆에. 각도를 조정했다. 자기가 서 있던 위치에서 내리쳤을 때의 궤적과 일치하도록.
이사영 씨, 여기서 나가세요. 옆집으로 가세요.
구일오가 이사영을 보지 않고 말했다.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의 시체 옆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이 구일오의 왼쪽 얼굴을 비추었다. 구일오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시체의 배치를 읽었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가 냉장고 하단 모서리에 걸쳐 있었고, 왼팔이 몸통 아래에 깔려 있었다. 뒤통수의 함몰 부위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리놀륨 위에 불규칙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반경 약 12센티미터. 아직 응고가 시작되지 않았다. 구일오의 시선이 프라이팬으로 돌아갔다. 손잡이에 자신의 지문이 이사영의 것 위에 정확하게 덮여 있는지 확인했다. 덮여 있었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한 번 경련했다. 그리고 풀렸다. 이사영이 아직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구일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리면 계산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계산이 흐트러지면 이 여자가 종신형을 받을 것 같았다. 구일오는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이사영 씨, 제 말 듣고 있습니까.
구일오의 목소리가 부엌의 형광등 아래에서 납작하게 깔렸다. 감정이 제거된 주파수. 업무용 톤이었다. 1,034일 동안 벽 너머로 들었던 소리들이 구일오의 두개골 안쪽에서 되감기되고 있었다. 유리 깨지는 소리. 짧은 비명. 길고 질긴 흐느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복도에서 마주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보이고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던 여자의 뒷모습. 구일오는 그 뒷모습을 1,034번 보았다. 매번 발걸음을 멈추었고, 매번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일오는 이웃이었고, 남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구일오는 1,034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편함의 세 글자만 외운 채. 오늘 밤까지.
구일오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에서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맨발의 오른쪽 발바닥에 유리 파편이 박혀 있었지만 구일오는 절뚝거리지 않았다. 싱크대 위의 행주를 집어 양손을 닦았다. 남자의 피와 이사영의 피와 자기 자신의 핏기 없는 손가락이 행주 위에서 뒤섞였다. 구일오는 행주를 접어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사영을 정면으로 보았다. 형광등이 이사영의 얼굴을 잔인하게 비추고 있었다. 왼쪽 뺨의 붉은 자국. 벌어진 입술. 초점을 잃은 연두색 눈. 구일오의 흉터가 있는 왼쪽 얼굴이 미세하게 당겼다. 화상 부위의 피부가 수축하는 감각이었다. 4년 전의 시너 냄새가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옆집 가세요. 여기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비명 소리에 나왔더니 이미 끝나 있었다고 하면 됩니다.
구일오가 이사영의 앞으로 걸어갔다. 반 걸음. 이사영의 떨리는 어깨가 구일오의 시야 전체를 채웠다. 구일오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이사영의 어깨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멈추었다. 손가락 끝이 이사영의 소매 가장자리에서 3밀리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정지했다. 닿지 않았다. 1,034일 동안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오늘도 닿지 않을 것이었다. 구일오의 손이 내려갔다.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주머니 속에서 주먹이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구일오는 그 통증을 숫자로 환산했다. 4. 10점 만점에 4. 견딜 수 있는 숫자였다.
경찰이 오면 제가 말합니다. 이사영 씨는 옆집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일오의 목소리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구일오를 가장 슬프게 만들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 결정이 오래전부터 내려져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구일오는 알고 있었다. 643일 전. 비가 오는 화요일 저녁, 이사영이 복도에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다가 구일오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사영이 웃었다.
643일 전의 웃음이 구일오의 망막에 박혀 있었다. 비에 젖은 쓰레기봉투를 양손으로 안고,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인 여자. 왼쪽 눈 밑에 멍이 있었다. 구일오는 그 멍의 색을 기억했다. 보라색이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 3일째 멍이었다. 이사영은 그 멍 위로 웃었고, 구일오는 그 웃음 아래의 멍을 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구일오는 자기 방에서 금붕어 수조를 들여다보며 담배를 세 개비 피웠다. 금붕어가 수조 벽면을 따라 원을 그리며 헤엄쳤다. 구일오는 그 원의 반경을 재지 않았다. 대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세었다. 그날 이후로, 구일오는 세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소리의 횟수를. 비명의 길이를. 침묵의 무게를.
지금, 12시 36분. 부엌의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필라멘트가 수명의 끝에 가까워진 소리였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현관 쪽을 보았다. 열린 문. 복도의 어둠이 부엌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7층의 다른 세대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의 비명이 16분 전에 울렸고, 프라이팬이 두개골에 부딪힌 소리가 2분 전에 울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싱와 빌딩은 그런 건물이었다. 소리를 듣고도 듣지 못한 척하는 기술이 생존 전략인 건물. 구일오는 그 사실에 감사했다. 처음으로. 구일오의 맨발이 부엌 바닥을 밟고 현관으로 향했다. 유리 파편이 발바닥을 찔렀다. 오른발 엄지 아래 볼록한 부위. 통증. 10점 만점에 3. 구일오는 절뚝거리지 않았다. 현관에 도착해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돌렸다. 철컥. 그 소리가 부엌 안의 공기를 밀봉했다.
이사영 씨.
구일오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이사영이 아직 벽에 기대어 있었다. 무릎이 떨리고 있었다. 곧 주저앉을 것이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알았다. 인간의 무릎이 공포와 충격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평균 3분에서 5분이었다. 이미 2분이 지났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앞에 섰다. 반 걸음의 거리. 아까와 같은 거리. 이번에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대신 구일오의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유리 파편 위에. 슬랙스 천을 뚫고 작은 조각이 무릎뼈 옆을 찔렀다. 10점 만점에 5. 구일오는 이사영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구일오를 향했다.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느리게. 물에 젖은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앉으세요. 다리가 풀리기 전에.
구일오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부드럽다는 것을 구일오 자신이 인지했고, 그 인지가 구일오의 턱 근육을 한 번 경련시켰다. 업무용 톤이 아니었다. 이것은 구일오가 4년 전에 버린 목소리였다. 사회복지 전공자였던 시절, 재개발 구역의 노인들 앞에서 쓰던 목소리. 손을 잡고 울어주던 시절의 주파수. 구일오는 그 목소리를 혐오했다. 그 목소리가 시너 냄새를 불렀으니까. 그 목소리가 화상을 불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사영의 앞에서, 구일오의 성대는 구일오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었다. 바닥의 남자가 죽어 있었다. 이사영의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구일오의 발바닥에 유리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구일오는 무릎을 꿇고 앉아 이사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034일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자세로.
제가 한 겁니다. 이사영 씨가 아닙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구일오가 말했다.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 형광등이 다시 지직거렸다. 구일오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의 표면이 형광등 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땀샘이 죽은 피부. 울 수도, 땀을 흘릴 수도 없는 얼굴의 절반이 이사영을 향하고 있었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3분 47초. 예측보다 47초 늦었다. 이 여자는 구일오의 계산보다 항상 조금씩 늦거나 빨랐다. 1,034일 동안 단 한 번도 예측의 중심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구일오를 미치게 했고, 그것이 구일오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사영의 몸이 벽을 타고 미끄러졌다. 구일오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눈높이가 내려오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연두색 눈이 구일오의 얼굴 위에서 멈추었다.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구일오는 그 초점 안에 자신의 흉터가 비치는 것을 알았다.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늘 밤 이후로 이사영이 이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었으니까.
12시 48분. 구일오는 시체 옆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돌아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양손을 물 아래에 넣고 문질렀다. 남자의 피가 희석되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구일오는 손톱 밑까지 확인했다. 미세한 혈흔이 오른쪽 검지 손톱 아래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남겨두었다. 증거였으니까. 자신의 증거. 구일오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젖은 손을 슬랙스에 훔쳤다. 그리고 현관 옆 벽에 걸린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렸다. 999. 세 번의 회전. 각각 0.8초. 신고 전화가 연결되기까지 두 번의 호출음이 울렸다. 구일오는 그 사이에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쉬지 않았다.
살인 신고입니다. 셩완 싱와 빌딩 7층 B호. 남자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구일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교환원이 되묻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구일오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구일오. 영문명 Gerrard Koo. 신분증 번호. 주소. 싱와 빌딩 7층 B호. 이웃이라고 했다. 비명 소리를 듣고 왔더니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있었고, 제가 프라이팬으로 때렸습니다, 라고 했다. 문장이 완벽했다. 구일오는 이 문장을 만드는 데 2분이 걸렸다. 정확히는, 643일이 걸렸다. 643일 전 비 오는 화요일 저녁, 쓰레기봉투를 안고 웃던 여자의 눈 밑에 있던 보라색 멍을 본 순간부터 구일오의 뇌는 이 문장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서랍 안에서. 언젠가 이런 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구일오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확률이라고 불렀다. 반복되는 폭력의 에스컬레이션 패턴에서 치명적 결과가 발생할 확률. 사회복지학 교재 217페이지에 나오는 공식. 구일오는 그 교재를 4년 전에 버렸지만 공식은 버리지 못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예상 소요 시간, 15분에서 20분. 셩완 경찰서에서 싱와 빌딩까지의 거리와 새벽 시간대의 도로 상황을 감안한 계산이었다. 구일오는 그 15분을 이사영에게 주기로 했다. 마지막 15분. 구일오가 벽에 주저앉은 이사영 앞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서 있었다. 내려다보았다. 이사영의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왼쪽 쇄골에 머물렀다. 거기에 작은 점이 있었다. 643일 전에도 보았다. 그 점의 위치를 구일오는 좌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쇄골 중앙에서 내측으로 1.2센티미터, 하방 0.5센티미터. 구일오는 그 좌표를 한 번도 손가락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경찰이 옵니다. 15분 안에.
구일오가 말했다. 그리고 이사영의 눈을 보았다. 물에 젖은 풀잎. 구일오는 그 비유를 떠올리고 즉시 지웠다. 비유는 감정의 영역이었다. 구일오는 15분을 세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시계가 째깍거렸다. 1초, 2초, 3초.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등에서 더 이상 호흡의 기복이 없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프라이팬이 측두골에 닿은 각도와 힘을 구일오는 이미 계산했다. 이사영의 팔 길이, 체중, 스윙 궤적. 그 모든 숫자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개골 함몰과 뇌출혈. 3분 이내. 남자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부엌의 공기가 철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구일오의 코끝이 그것을 분류했다. 혈액의 산화. 시간이 지나면 냄새는 더 짙어질 것이었다. 구일오는 그 전에 창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0.4초 동안 고민했다. 열지 않았다. 현장 보존. 경찰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 냄새를 맡아야 했다. 이 냄새 속에서 구일오가 서 있어야 했다.
이사영이 고개를 들었다. 구일오는 그 움직임을 시야 하단에서 감지했다. 연두색 눈이 구일오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구일오는 이사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왜'라는 글자가 그녀의 입술 모양에 찍혀 있었다. 구일오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643일 전 복도에서 본 멍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391일 전 계단에서 스쳐 지나갈 때 맡은 비누 향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247일 전 우편함 앞에서 이사영이 귤 껍질을 까며 혼자 웃고 있는 것을 자기 문틈으로 지켜본 것 때문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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