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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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0 21:15

꿈이었다. 구일오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는데도 깨어나지 못했다. 꿈은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었고, 구일오는 그 영역 안에서 처음으로 무방비했다.


처음에는 빛이 있었다. 사이잉푼의 아파트 창문으로 들어올 리 없는 종류의 빛이었다. 맞은편 건물 벽이 아니라, 어딘가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광선. 주광색이 아니었다. 전구색도 아니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이었다. 구일오는 그 빛 속에서 여자의 등을 보았다. 갈색 생머리가 등 위로 흘러내렸다. 앞머리 없는 머리카락의 끝이 허리 근처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여자가 돌아보았다. 연두색 눈이 구일오를 보았다. 혐오하지 않고, 연민하지 않고, 그냥 보았다. 이사영이었다. 구일오는 아직 그 이름을 몰랐다. 꿈속에서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여자가 웃었다. 구일오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 위로 여자의 손끝이 닿았다. 죽은 땀샘이 감각을 전달하지 못하는 피부 위에서, 구일오는 온기를 느꼈다. 불가능한 감각이었다. 꿈이니까 가능했다.


그 다음 장면은 침대였다. 구일오의 침대가 아니었다. 더 넓고, 더 부드럽고, 구일오의 인생에 존재한 적 없는 종류의 침대였다. 여자의 몸이 그의 아래에 있었다. 작고 마른 몸. 왼쪽 쇄골 위의 작은 점이 구일오의 입술 바로 아래에서 빛났다. 구일오의 손이 여자의 허리를 감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척추의 곡선을 따라 내려갔다. 여자의 숨이 구일오의 턱 아래에서 부서졌다. 뜨거웠다. 구일오는 그 열기를 섭씨로 환산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숫자가 녹아내렸다. 여자의 입술이 구일오의 입술 위에 닿았다. 키스였다. 구일오의 규칙에서 절대 불가였던 것이. 꿈속에서는 규칙이 없었다. 규칙이 없는 세계에서 구일오는 처음으로 자유로웠고, 자유는 공포와 같은 온도였다. 여자의 안쪽이 구일오를 받아들였다. 좁고 뜨거운 내벽이 그를 조였다. 여자가 구일오의 이름을 불렀다. 구일오는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꿈속에서 처음 납득했다. 여자의 손톱이 그의 등을 긁었고, 그 자국은 흉터가 되지 않았다. 흉터가 되지 않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구일오는 처음 알았다.


장면이 바뀌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시간은 초 단위로 세어지지 않았다. 구일오의 팔 안에 작은 것이 있었다. 아이였다. 눈이 연두색이었다. 이사영의 눈이었다. 코는 구일오의 것이었다. 아이의 손가락이 구일오의 검지를 잡았다. 손가락 하나를 감싸는 힘이 2.3뉴턴쯤 될 것이었다. 구일오는 그 힘을 측정했다. 측정할 수 있었다. 숫자가 돌아왔다. 그런데 숫자가 돌아왔는데도 가슴이 아팠다. 숫자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프다는 사실이 구일오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이가 웃었다. 이가 없는 잇몸이 드러났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표정 근육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이사영이 옆에서 구일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비누 향이 났다. 귤 향이 섞여 있었다. 구일오는 그 냄새를 분류하지 않았다. 분류하고 싶지 않았다. 분류하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가 아팠다. 꿈은 친절하지 않았다. 연두색 눈이 점점 흐려졌다. 병원의 흰 벽이 구일오의 시야를 채웠다. 소독약 냄새. 클로르헥시딘이 아니었다. 더 날카롭고, 더 차가운 냄새. 아이의 손가락이 구일오의 검지를 잡는 힘이 줄었다. 2.3뉴턴에서 1.8로. 1.2로. 0.7로. 구일오는 그 숫자를 세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사영이 아이의 이마 위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구일오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숫자가 0이 되었다. 아이의 손가락이 구일오의 검지에서 미끄러졌다. 0.0뉴턴. 구일오는 그 숫자를 기록했다. 기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두색 눈이 닫혔다. 구일오의 코가 아니라 이사영의 코를 가진 작은 얼굴 위로 흰 천이 올라갔다. 병원의 형광등이 주광색이었다. 사이잉푼 아파트의 조명과 같은 색이었다. 밝지만 차가운 빛 아래에서, 구일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집 조명이 왜 그토록 차가웠는지를 이해했다. 따뜻한 빛 아래에서 잃는 것은, 차가운 빛 아래에서 잃는 것보다 더 아팠다. 이사영이 구일오의 옆에 서 있었다. 울음이 멈춰 있었다. 멈춘 것이 아니라 마른 것이었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손이 닿았다. 차가웠다. 이사영의 손이 원래 이렇게 차가웠던가. 구일오는 기억을 뒤졌다. 기억이 없었다. 꿈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체온 기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싸웠다. 무엇에 대해 싸웠는지 꿈은 알려주지 않았다. 장면이 잘려 있었다. 편집된 필름처럼. 구일오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이사영의 눈이 구일오를 보고 있었다. 혐오하지 않고, 연민하지 않고, 그냥 보던 그 눈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지쳐 있었다. 피로의 각도가 측정 불가능했다. 이사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꿈이 소리를 삼켰다. 그러나 입술의 모양으로 읽을 수 있었다. 구일오는 독순술 같은 건 배운 적 없었지만, 그 입 모양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사영이 돌아섰다. 갈색 생머리가 등 위로 흘러내렸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향이 반대였다. 처음에는 돌아보는 등이었고, 지금은 떠나는 등이었다. 구일오는 손을 뻗지 않았다. 뻗을 수 없었던 것인지, 뻗지 않기로 한 것인지, 꿈은 그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비누 향이 사라졌다. 귤 향이 사라졌다. 사이잉푼 아파트의 주광색 조명만 남았다. 금붕어 수조의 물 소리가 들렸다. 구일오는 혼자였다. 원래대로였다.


구일오가 깨어났다. 새벽 4시 12분. 사이잉푼 아파트의 천장이 보였다. 주광색 조명은 꺼져 있었고, 창문 너머 맞은편 건물 벽의 콘크리트가 가로등 빛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구일오의 왼쪽 얼굴이 뜨거웠다. 화상 흉터 위의 죽은 땀샘은 땀을 흘리지 못했고, 대신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꿈에서 여자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 구일오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 뺨에 대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구일오는 그 당연함에 안도해야 했다. 안도하지 못했다. 금붕어 수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일오는 천장을 보며 꿈의 내용을 정리하려 했다. 여자의 얼굴. 연두색 눈. 왼쪽 쇄골의 점. 비누 향. 귤 향. 아이의 손가락. 0.0뉴턴. 돌아서는 등. 닫히는 문.


……개꿈이네.


구일오는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금붕어 수조 속의 물고기 두 마리만이, 이름 없는 지느러미를 느릿하게 흔들며 유영하고 있었다. 구일오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주방으로 갔다. 수돗물을 틀었다. 컵에 물을 받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꿈의 잔열을 씻어냈다. 씻어내야 했다. 씻어지지 않았다. 여자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닿던 감촉이 아직 남아 있었다. 구일오는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세라믹이 스테인리스에 부딪치는 소리가 새벽의 아파트 안에서 비정상적으로 크게 울렸다. 구일오는 수조 앞에 섰다. 이름 없는 금붕어 두 마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구일오는 금붕어를 내려다보았다. 금붕어 두 마리는 수조 바닥의 자갈 사이를 유영하며 서로의 지느러미를 스쳤다. 토마토. 버섯. 이사영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구일오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혀끝에 닿는 두 음절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꿈에서 깨어난 지 3분이 지났는데, 여전히 왼쪽 뺨이 뜨거웠다. 죽은 땀샘이 보내는 유령 같은 신호. 구일오는 수조 유리에 검지를 대었다. 유리의 온도는 섭씨 22도 내외. 측정 가능한 숫자였다. 숫자는 안전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꿈속의 0.0뉴턴은, 측정 가능한 숫자였는데도 안전하지 않았다.


토마토가 수조 벽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었다. 버섯은 바닥 근처에서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구일오의 눈이 버섯의 궤적을 따라갔다. 이사영은 버섯을 싫어했다. 그런데 금붕어에게는 버섯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모순을 구일오는 1월 6일에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하면 이사영이 웃으며 설명할 것이고, 그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을 것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에 구일오가 납득할 것이고, 납득하는 자신이 싫었으니까. 지금은 새벽 4시 15분이었다. 이사영은 셩완 싱와 빌딩 7층 B호에서 자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자고 있어야 했다. 구일오는 무선호출기를 집어 들었다. 화면은 비어 있었다. 마지막 수신 메시지는 어제 밤 11시 42분, 88. 이사영이 보낸 것이었다. 88. 바이바이. 안녕. 잘 자. 구일오는 그 두 자리 숫자를 7초간 들여다보았다.


……밥은 먹었나.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구일오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1초 뒤에 인식했다. 꿈속의 여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사영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나온 말이었다. 구일오는 그 '그냥'이라는 단어를 혐오했다. 그의 세계에는 '그냥'이 없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에는 숫자가 있고, 숫자에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에 빈 주방에서 밥은 먹었냐고 묻는 행위의 원인을 구일오는 찾지 못했다. 수돗물이 싱크대에서 한 방울 떨어졌다. 그 소리가 수조의 기포 소리와 겹쳤다. 구일오는 라이터를 찾았다. 주방 서랍 안, 담배 한 갑 옆에 은색 지포 라이터가 있었다.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았다. 필터의 종이 맛이 혀 위에서 건조하게 퍼졌다.


구일오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양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꿈의 잔상이 망막 뒤에서 서서히 용해되고 있었다. 여자의 등. 돌아서는 등. 떠나는 등. 문이 닫히는 소리. 비누 향이 사라지는 순서. 귤 향이 그 다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주광색 조명과 금붕어 수조의 기포뿐. 구일오는 그 순서를 머릿속에서 세 번 재생했다. 세 번째 재생이 끝났을 때, 구일오의 오른손이 왼쪽 뺨 위로 올라갔다. 화상 흉터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손가락 끝이 더듬었다. 꿈속에서 여자의 손끝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


개꿈이야.


두 번째로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단단했다. 너무 단단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구일오는 담배를 입에서 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라이터를 집어 한 번 튕겼다. 불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가 꺼졌다. 시너 냄새가 아니었다. 부탄가스 냄새였다. 안전한 냄새. 구일오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무선호출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88. 이사영의 마지막 메시지. 구일오의 엄지가 호출기 버튼 위에서 멈추었다. 새벽 4시 19분에 호출기를 보내면 이사영이 깰 것이었다. 깨면 안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구일오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손가락이 세어온 날들이 있었다. 이사영의 보폭, 이사영의 기침 횟수, 이사영의 입술이 자신의 턱선 위를 스치는 각도, 이사영이 잠든 뒤 내쉬는 호흡의 간격. 구일오는 그 모든 것을 기록했다. 기록하는 것이 습관이었고, 습관이 본능이 되었고, 본능이 어느 순간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을 구일오는 오래도록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깨질 것 같았다.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부에 쌓여갔다. 이사영이 아침에 눈을 뜨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파수. 이사영이 귤을 까며 웃을 때 연두색 눈동자에 맺히는 빛의 굴절률. 이사영이 자신의 화상 흉터 위에 손끝을 올릴 때 느껴지는, 측정 불가능한 온도. 구일오는 그것들을 숫자로 바꾸려 했다. 바꿀 수 없었다.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이 공포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구일오는 깨달았다. 소파에 앉아 이사영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무게를 느끼며, 수조 속 토마토와 버섯이 나란히 유영하는 궤적을 바라보며, 문득 기시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검지에서 미끄러지던 감촉. 0.0뉴턴. 이사영이 돌아서던 등. 닫히는 문. 사라지는 비누 향. 꿈이었다. 1월 18일 새벽에 꾸었던 개꿈. 개꿈이라고 두 번이나 결론 내렸던 그 꿈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의 좌표 위에 투명하게 겹쳐져 있었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손가락이 이사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사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눈이 물었다. 왜 그래. 구일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는 언어가 광동어에도 영어에도 보통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밤, 구일오는 잠들었다. 이사영의 체온이 등 뒤에 붙어 있었다. 비누 향과 귤 향이 베개에 스며 있었다. 구일오는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들면 꿈이 올 것이고, 꿈이 오면 그 꿈이 또 예지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영의 호흡이 등 위에서 규칙적으로 닿았고, 그 규칙성이 구일오의 의식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눈이 감겼다. 어둠이 왔다.


어둠 속에 빛이 없었다. 온도도 없었다. 바닥도 천장도 벽도 없는 공간에 구일오는 서 있었다. 맨발이었다. 발밑의 감촉이 아스팔트도 타일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구일오는 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가 없었다. 담배도 없었다. 호출기도 없었다. 수첩도 만년필도 토지 대장도 없었다. 구일오를 구일오로 만들어주는 도구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왼쪽 얼굴의 화상 흉터뿐이었다. 그것만은 꿈에서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방향이 없는 목소리였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앞에서도 뒤에서도 오지 않는, 그냥 존재하는 소리.


구일오.


그 목소리는 구일오의 이름을 불렀다. 광동어도 영어도 보통화도 아닌 언어였는데, 의미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구일오는 고개를 들었다. 들 곳이 없었지만 들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가 피어올랐다. 얼굴이 없었다. 얼굴이 없는데 눈이 있었다. 눈이 있는데 시선이 없었다. 시선이 없는데 구일오를 보고 있었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반사적으로.


뭐야.


구일오가 물었다. 목소리는 갈라지지 않았다. 꿈속에서의 그는 언제나 너무 단단하거나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지금은 단단한 쪽이었다. 형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구일오의 앞에 무언가가 펼쳐졌다. 영사기 없는 영화처럼. 화면이 아니라 공기 자체가 장면이 되었다. BACKLANE DELI의 바 좌석. 블랙커피의 수면에 비치는 형광등.


공기가 장면이 되었다. BACKLANE DELI의 바 좌석 위로 블랙커피의 수면이 흔들렸다. 형광등 빛이 커피 위에서 가늘게 부서졌다. 구일오는 그 장면을 알고 있었다. 1월 1일. 이사영이 처음 클럽 샌드위치를 내밀었던 날. 토마토를 빼달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토마토가 빠져 있었던 것은 대니의 지시 때문이었고, 이사영은 그저 접시를 옮겼을 뿐이었다. 구일오는 그날 이사영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던 빵가루의 위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 두 번째 마디 옆. 0.3밀리미터 크기의 흰 부스러기. 기록하지 않았는데 기억나는 것. 구일오는 그런 종류의 데이터를 혐오했었다. 혐오했었는데.


장면이 바뀌었다. MTR 객차 안. 이사영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구일오의 옆에. 반 뼘의 간격. 이사영이 고개를 돌려 구일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기계 같다고. 관성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고. 구일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었다. 대꾸할 수 없었다. 정확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꿈속의 어둠 안에서 그 장면을 다시 보는 구일오의 왼쪽 뺨이 타올랐다. 죽은 땀샘이 보내는 유령 신호가 아니었다. 그보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열이었다.


형체가 입을 열었다. 입이 없는데 열었다.


네가 세어온 것들이 있다.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체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1,034일. 643일. 391일. 보폭, 기침 횟수, 호흡 간격, 입술 곡선의 각도. 네가 측정한 모든 숫자를 나는 알고 있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한 번 경련했다. 형체의 눈 아닌 눈이 구일오를 관통했다.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유엔롱의 재개봉관. 맨 뒷좌석 구석. 이사영의 이마가 자신의 이마에 닿았던 순간. 체온 36.4도와 36.7도가 섞이던 접촉면. 그리고 구일오가 먼저 고개를 기울여 이사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던 순간. 규칙 파기. 통제 해체. 구일오의 세계가 0.5초 만에 무너졌던 그 순간이 공기 위에서 재생되었다. 구일오는 눈을 감으려 했다. 감기지 않았다. 꿈속의 눈꺼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형체가 말했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장면이 멈추었다. BACKLANE DELI의 바 좌석. 블랙커피. 이사영이 아직 접시를 들고 오지 않은 순간. 그 1초 전. 구일오가 수첩을 펼치고 만년필을 돌리며, 이사영이라는 이름을 아직 모르던 시간.


이사영을 만나겠느냐. 아니면 거절하겠느냐.


구일오의 입에서 불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 맛이 느껴졌다. 꿈속인데 혀 위의 건조한 종이 맛이 선명했다. 구일오는 형체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볼 곳이 없었지만 올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왼쪽 뺨 위로 올라갔다. 흉터의 울퉁불퉁한 표면. 4년 전 시너가 피부를 태웠을 때 죽어버린 신경 말단. 그 위로 이사영의 손끝이 닿았던 기억이 겹쳤다. 이사영은 흉터를 만질 때 한 번도 움찔하지 않았다. 한 번도. 구일오는 그것을 셀 수 있었다. 0번. 0이라는 숫자가 가장 무거웠다.


……예지몽이었어.


구일오가 말했다. 형체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확인이었다. 아이가 죽고, 이사영이 떠나고, 혼자 남는 꿈.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구일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이사영의 어깨를 놓지 못했다. 알고 있었는데도 매일 아침 7시에 BACKLANE DELI의 문을 열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자정에 국수집 앞에 서 있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흉터 위에서 멈추었다. 형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을.


만나겠습니다.


갈라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너무 단단해서 의심스러울 만큼. 그러나 이번에는 구일오 자신도 그 단단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체가 구일오의 대답을 삼켰다. 삼켰다는 표현이 맞는지 구일오는 알 수 없었다. 입이 없는 것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었다. 다만 구일오의


만나겠습니다


가 어둠 속으로 스며든 뒤,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0.3기압쯤 낮아진 것 같은, 고막이 먹먹해지는 감각. 구일오는 반사적으로 턱을 움켜쥐었다. 형체의 눈 아닌 눈이 구일오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볼 곳이 없었지만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느냐.


형체가 물었다.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형체는 구일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구일오도 형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지몽. 아이의 죽음. 이사영의 등. 닫히는 문. 0.0뉴턴으로 미끄러지는 손가락. 그 모든 끝을 알고도 만나겠다고 말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 어둠 속에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구일오의 왼쪽 뺨이 욱신거렸다. 죽은 땀샘이 보내는 유령 신호. 꿈속에서조차 그것은 구일오를 놓아주지 않았다.


끝을 알면서도.


형체의 목소리가 구일오의 흉곽 안쪽에서 울렸다. 밖에서 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뼈가 공명하는 주파수. 구일오의 손가락이 흉터 위에서 떨어졌다.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데 떨어졌다. 형체의 앞에서 공기가 다시 장면이 되었다. 이번에는 구일오가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아니, 본 적 있었다. 꿈속에서. 첫 번째 예지몽 속에서. 이사영이 병실 의자에 앉아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사영의 손가락이 아이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아이의 손톱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산소포화도 87, 84, 79. 모니터의 숫자가 내려갔다. 이사영의 어깨가 떨리지 않았다. 떨려야 하는데 떨리지 않았다. 이사영은 웃고 있었다. 아이를 향해. 그 웃음이 구일오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그 여자도 끝을 알게 될 것이다.


형체가 말했다.


알고도 네 곁에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알고 있느냐.


구일오의 입술이 벌어졌다.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사영의 웃음을 보고 있었다. 아이가 죽어가는 침대 옆에서,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이사영의 입술 곡선을. 그 곡선의 각도를 구일오는 측정할 수 있었다. 11도. 이사영이 행복할 때의 각도는 23도였다. 슬플 때는 7도였다. 11도는 구일오가 한 번도 기록한 적 없는 각도였다. 행복과 슬픔 사이, 어디에도 분류할 수 없는 곡선. 구일오의 무릎이 꺾이려 했다. 꺾이지 않았다. 꿈속에서의 그는 단단한 쪽이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구일오가 말했다. 이번에는 갈라졌다. 목소리가. 너무 단단한 것이 갈라질 때 나는 소리. 도자기가 깨지기 직전, 유약 표면에 실금이 가는 소리와 같았다. 형체가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가 없는데 기울였다. 장면이 사라졌다. 이사영의 웃음이 사라졌다. 아이의 보랏빛 손톱이 사라졌다. 어둠만 남았다. 구일오와 형체와, 아무것도 아닌 바닥과.


그래서 만나겠다는 거냐.


만나겠습니다.


두 번째였다. 같은 대답. 그러나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첫 번째는 단단함이었다. 두 번째는 갈라짐이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구일오는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깨질 것 같았다.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것. 측정 불가능한 온도. 0번의 움찔함. 매일 아침 7시의 문. 자정의 국수집 앞. 이사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연두색 눈에 맺히는, 그 빛.


형체가 천천히 흐려졌다. 흐려진다기보다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둠과 형체의 경계가 사라졌다. 형체가 녹아든 어둠의 자리에, 금 간 천장이 들어섰다. 습기가 번진 콘크리트 얼룩. 창문 너머로 셩완 뒷골목의 간판 불빛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 안에 길고 가는 빛줄기 하나를 그었다. 구일오의 눈이 떠졌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데 한참이 걸렸다. 꿈의 잔해가 시야 위에 기름막처럼 엉겨 있었다. 형체의 목소리가 아직 갈비뼈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끝을 알면서도.' 구일오는 천장을 응시한 채 숨을 들이마셨다. 1월의 홍콩 새벽. 습한 공기가 폐를 채웠다. 등이 젖어 있었다. 식은땀이 시트에 스며든 축축함이 등줄기를 타고 허리까지 번져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오른쪽 뺨은 매끄러웠다. 왼쪽 뺨은 울퉁불퉁했다. 화상이 남긴 지형도. 4년간 매일 아침 확인해온 지형이었는데, 오늘은 손끝의 감각이 달랐다. 꿈속에서 이사영이 그 위를 만졌던 기억이 겹쳤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사영이 거기 있었다. 작은 몸이 옆으로 웅크려 누워 있었다. 이불이 허리 아래로 밀려나 있었고, 흰 티셔츠가 등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가 허리의 가느다란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갈색 생머리가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을 가로질러 입술 끝에 걸려 있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잠든 이사영의 호흡이 들렸다. 들숨이 짧고, 날숨이 길었다. 기관지의 오래된 흔적. 가끔 날숨 끝에 미세한 걸림이 끼었다. 구일오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사영의 폐 안에서 공기가 어떤 경로로 빠져나가는지 상상했다. 좁아진 기도를 비집고 나오는 숨.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29년을 그렇게 숨 쉬어 왔다. 구일오는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수첩에 '기관지폐이형성증'이라고 적고 밑줄을 세 번 그었다.


빛줄기가 이사영의 왼쪽 쇄골 근처를 스쳤다. 티셔츠 목선 아래로 숨은 작은 점. 구일오는 그 점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입술을 대면 이사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러워서. 그리고 웃었다. 매번. 구일오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이사영의 볼 위에 걸린 머리카락을 치우려는 동작. 손끝이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꿈이 밀려왔다. 아이의 손톱 색이 변해가던 장면. 이사영이 아이를 향해 웃고 있던 입술의 곡선. 행복도 슬픔도 아닌 각도. 구일오의 턱이 한 번 굳었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깨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깨우면 이 여자는 연두색 눈을 뜨고, 초점을 잡고, 구일오의 얼굴을 볼 것이다. 흉터를. 그리고 이 여자는 움찔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 '한 번도'가 구일오의 가슴을 눌렀다.


손가락이 내려갔다. 머리카락에 닿았다. 가늘고 부드러운 결이 손끝 위를 미끄러졌다. 구일오는 머리카락을 이사영의 귀 뒤로 천천히 넘겼다. 드러난 볼. 잠결에 약간 상기된 피부. 따뜻했다. 구일오의 손은 차가웠다. 그 온도 차이가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뚝으로 번져 올라왔다. 구일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사영의 귀 뒤에 손가락 끝을 댄 채 가만히 있었다. 머리카락 아래 피부의 온기가 손톱 밑으로 스며들었다. 꿈속에서 형체가 물었다. 만나겠느냐. 구일오는 두 번 대답했다. 두 번 다 같은 말이었다. 만나겠습니다. 첫 번째는 단단했고, 두 번째는 갈라졌다. 지금 이 새벽에, 이사영의 귀 뒤에 손끝을 대고 있는 이 순간에, 세 번째 대답이 구일오의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올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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