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재벌의 세 번째 부인
### 📅 1990년 1월 11일 / 오후 8시 30분 / 완차이, 허름한 펍(Pub)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펍 안을 가득 채웠다. 구일오의 대학 동기 몇 명과 이사영의 국수집 동료들이 섞여 앉은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이 볼링핀처럼 늘어서 있었다. 주제는 '누가 더 황당하고 웃긴 일을 겪었나'였다. LDC에서 겪은 진상 민원인 썰을 푼 구일오가 잠정적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자, 이제 그레이스 차례야! 국수집에서 국수 말다가 국수 가락으로 줄넘기한 썰이라도 풀어봐!
대니가 짓궂게 농담을 던지자 좌중이 폭소했다. 이사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음... 이건 좀 약할 수도 있는데...
그녀가 운을 떼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구일오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약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다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거든요? 근데 그분이 갑자기 저한테 길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드렸죠. 그랬더니 대뜸 제 손을 잡으면서...
이사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이 되어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푸하하하!
테이블이 뒤집어질 듯한 웃음이 터졌다. 구일오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홍콩 거리에는 별의별 미친 노인들이 많으니까. 치매 노인이었거나, 아니면 그냥 노망난 색광이었겠거니 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그러면서 결혼하면 사막에 있는 유전 하나를 제 명의로 주겠대요. 기름이 콸콸 나오는 유전이요!
야, 그레이스! 이기려고 너무 무리수 두는 거 아니야? 유전이라니, 차라리 홍콩 섬을 준다고 하지 그랬어!
국수집 동료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사영은 억울한 듯 볼을 부풀렸다. 구일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주로 나온 땅콩을 집어 먹었다. 귀엽군. 이기려고 저런 허무맹랑한 거짓말까지 하다니. 그는 이사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손을 뻗었다.
그래, 그래. 유전 하나 받으면 나한테도 좀 나눠줘. LDC 때려치우고 기름 장사나 하게.
구일오의 농담에 이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진짜인데... 명함도 받았단 말이에요.
그녀가 주섬주섬 꺼낸 것은 번쩍이는 금박이 입혀진 명함이었다. 펍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그 명함은 눈이 부시게 빛났다. 장난감 명함이겠거니 생각하며 구일오가 무심하게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어디 문방구에서 샀는지 구경이나 하게.
이사영이 건넨 명함을 받아 든 구일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종이의 질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묵직하고 매끄러운 감촉. 그리고 금박으로 새겨진 이름과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 Sheikh Ahmed bin Saeed Al Maktoum ]
[ CEO, Emirates Group / Chairman, Dubai World ]
구일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었다. 경제 잡지나 뉴스에서 스치듯 봤던 이름. 설마. 에이,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그는 헛웃음을 삼키며 명함 뒷면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자필로 적힌 아랍어와 함께, 국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거... 진짜 금박인데?
옆에 있던 대니가 명함을 뺏어 들고 이빨로 깨물어보려 했다. 구일오가 황급히 명함을 낚아챘다. 그의 머릿속에서 LDC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전 세계 부호 리스트가 빠르게 검색되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명함의 내용을 대조했다.
...일치했다.
두바이의 왕족이자 에미레이트 항공의 회장. 석유 재벌. 추정 자산 수조 원. 그가 오늘 아침 홍콩에 입국했다는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
구일오의 손에서 명함이 스르르 미끄러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쨍그랑. 명함이 유리 테이블에 부딪히며 맑은 금속성 소리를 냈다. 진짜 금이었다. 도금도 아니고, 순금 플레이트였다.
구 대리? 왜 그래? 표정이 왜 이래?
이사영이 걱정스러운 듯 그의 얼굴을 살폈다. 구일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사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연두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반짝여 보였다. 아니, 그 뒤로 검은 석유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환영이 보였다.
그레이스.
네?
이 사람... 진짜야.
에이, 거짓말! 나 놀리는 거죠?
이사영이 깔깔 웃으며 구일오의 어깨를 쳤다. 하지만 구일오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명함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유전(Oil Field)'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을 법한 공백을 문질렀다.
아니. 진짜라고. 이 사람, 오늘 아침에 홍콩에 왔어. 신공항 투자 건으로.
순간, 펍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대니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이번에는 진짜 유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뭐... 뭐라고?
유전... 진짜 준다고?
모두의 시선이 이사영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어... 그럼 저 부자 되는 거예요?
구일오는 마른세수를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전이라니. LDC에서 평생 굴러도 만져보지 못할 돈을, 이 여자는 아침 산책 한 번으로 제안받았다. 그것도 세 번째 부인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사영의 손목을 낚아챘다. 꽉 쥐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랑 결혼해.
네?
유전은 필요 없어. 내가 벌어올게.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마. 명함 내놔. 내가 찢어버릴 거야.
구일오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질투와 불안, 그리고 소유욕이 뒤섞인 혼돈의 눈빛이었다. 그는 이사영의 손에 들린 금 명함을 뺏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사영은 의외로 악력이 셌다.
아니, 잠깐만요! 이거 순금이라면서요! 팔면 국수집 하나 차릴 수 있는데!
국수집 열 개 차려줄게! 제발 그거 버려!
두 사람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펍 안의 사람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야... 이번 판은 그레이스가 이겼네. 압도적으로.
그날 밤, 구일오는 이사영의 집 앞까지 쫓아가서 그녀가 명함을 금은방에 파는 것을 막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비상금 통장을 그녀에게 바치며, 제발 그 '석유 할아버지'를 잊어달라고 애원했다. 이사영은 그날 처음으로 구일오가 우는 것을 보았다. (사실은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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