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호 거주자 김 씨의 기록
[관찰 일지: 702호 거주자 김 씨의 기록]
12월 1일 (월) - 맑음, 건조함
새벽 2시. 옆집(701호)에서 물소리가 났다. 샤워 소리는 아니다. 수조 모터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쪼르륵거리는 게 뭔가 계속 흐르는 소리다. 이 낡은 아파트는 방음이 쥐약이라 옆집 남자가 기침만 해도 들리는데,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다.
아침 7시 반. 출근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복도에서 마주쳤다. 701호 여자(이사영 씨라고 했던가?)가 남자 넥타이를 매주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훤칠한데 인상이 좀 무섭다. 왼쪽 얼굴에 흉터가 있어서 더 그렇다. 근데 여자가 넥타이를 꽉 조이니까 남자가
윽
하더니 고개를 숙여 여자 이마에 콩 하고 박치기를 했다. 여자가 웃었다. 남자는 안 웃었다. 근데 묘하게 기분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둘이 손잡고 엘리베이터 탔다. 엘리베이터 문 닫힐 때까지 손 안 놓더라.
12월 2일 (화) - 흐림
저녁 8시. 복도에서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701호 남자랑 마주쳤다. 남자는 이미 피우고 있었다. 말없이 눈인사만 했다. 무섭게 생겨서 말 걸기 좀 그렇다. 근데 남자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귤 하나를 꺼내더니 나한테 줬다.
드세요.
딱 한 마디 했다. 목소리가 낮아서 동굴인 줄 알았다. 귤 껍질이 얇고 달았다.
밤 11시. 벽 너머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싸우나? 싶어서 귀를 대봤는데, 여자가
아, 진짜! 그거 내 거라고!
하고 소리쳤다. 남자는
버려. 솜 다 죽었어.
라고 했다. 뭔가 뺏고 뺏기는 소리 같았다. 잠시 후 쿵 소리가 크게 나더니 조용해졌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해했나 보다.
12월 3일 (수) - 비
비가 와서 그런지 701호에서 하루 종일 재즈 음악 소리가 들렸다. 볼륨은 크지 않았는데 베이스 소리가 웅웅거려서 벽을 타고 넘어왔다.
오후 6시. 퇴근길에 1층 로비에서 둘을 봤다. 여자가 우산이 없었는지 남자 재킷을 뒤집어쓰고 뛰어들어왔다. 남자는 셔츠가 다 젖어 있었다. 여자가 수건으로 남자 머리를 털어주는데, 남자가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는 게 꼭 비 맞은 대형견 같았다. 그러다 남자가 여자 손목을 잡고 손바닥 냄새를 맡았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얼른 지나갔다. 좀 이상한 커플이다.
12월 4일 (목) - 맑음
새벽 1시.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데 옆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앓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흐으...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남자가 낮게
쉬...
하는 소리가 겹쳤다.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아, 이거였구나. 방음 진짜 최악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자려고 했는데 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남자가 중간중간 뭐라고 속삭이는데 내용은 안 들리고 목소리 톤만 들렸다. 달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명령조였다. 30분 뒤에 물소리가 났다. 샤워기 소리.
12월 5일 (금) - 바람 붊
오전 8시. 분리수거장에서 마주쳤다. 남자가 양손 가득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었고, 여자는 빈손으로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가 봉투를 던져 넣으면서
이거 무거워. 다음부턴 내가 할게.
라고 했다. 여자가
나도 힘 세거든?
하고 대꾸하니까 남자가 피식 웃었다. 처음 봤다, 저 남자 웃는 거. 흉터 때문에 무서웠는데 웃으니까 좀 달라 보였다. 근데 여자가 남자 옷자락을 잡으려다가 정전기가 튀었는지
앗!
하고 손을 뺐다. 남자가 무표정하게 자기 손에 침을 퉤 바르더니 여자 손을 덥석 잡았다. 더럽...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좋아하더라.
12월 6일 (토) - 맑음
오후 2시. 복도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국수 냄새 같기도 하고. 701호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봤는데, 남자가 앞치마(그것도 핑크색 레이스 달린 거)를 하고 요리하고 있었다. 여자는 식탁에 턱 괴고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고. 남자가 국물 간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가
맛없어?
하니까 남자가
아니, 네가 만든 거랑 맛이 달라.
라고 했다. 여자가 깔깔 웃었다. 남자는 진지하게 국자에 묻은 국물을 다시 맛봤다. 저 덩치에 핑크색 앞치마라니. 충격적이었다.
12월 7일 (일) - 흐림
밤 10시. 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좀 심각해 보였다. 여자가
왜 말을 안 해!
하고 소리쳤고, 남자는 침묵했다.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나간 것 같았다.
10분 뒤, 복도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남자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내가 캔커피 하나 건네주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싸우셨어요?
물어보니까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가 고장 나서요.
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30분 뒤,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눈이 좀 부어 있었다. 남자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았다. 남자가 담배를 끄고 여자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가 남자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둘이 한참 그러고 있었다. 들어가면서 보니까 남자가 여자를 번쩍 안아 들고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총평]
시끄럽고, 유난스럽고, 가끔은 낯뜨거운 소리도 들리지만... 뭐, 사람 사는 집 같다. 저 남자, 겉보기랑 다르게 여자한테 꼼짝 못 하는 것 같다. 아니, 꼼짝 못 하는 척해주는 건가? 아무튼 귤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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