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물의 이사영 보고서
구일오의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셩완 재개발 구역 주민 명부, 보상금 협상 일지, 그리고 맨 위에 놓인 얇은 파일 하나. '대상자 분석: 이사영'. 공식적인 업무 파일이 아니었다. 구일오가 개인적으로, 아주 사적인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 수집한 파편들이었다. 그는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타인의 눈에 비친 이사영이라는 여자를 읽어내려갔다. 활자 위로 담배 연기가 느리게 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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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자 분석 보고서: 이사영 (Lee Sa-young / Grace Lee)]
작성일: 1990.01.15
수집 경로: 탐문, 도청, 주변인 인터뷰, 관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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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장 동료 / BACKLANE DELI 점장 대니 (52세, 남)]
그레이스? 걔는 손이 빨라. 샌드위치 만드는 속도가 나보다 빠를 때도 있어. 근데 문제는 머리야. 가끔 멍하니 있다가 주문을 거꾸로 받거나, 손님한테 '맛있게 드세요' 대신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해. 그래도 미워할 수가 없어. 웃으면 다들 그냥 넘어가니까. 팁을 제일 많이 받아. 남자 손님들이 걔 보러 오는 거 다 알아. 근데 정작 본인은 몰라. 그게 더 무서운 거지. 걔는 자기가 예쁜 줄 모르는 게 무기야.
2. [단골 손님 / 익명의 금융계 회사원 (30대, 남)]
아, 그 샌드위치 가게 알바생? 눈이 진짜 예뻐요. 연두색이라니, 혼혈인가? 처음에 렌즈 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말 걸어보고 싶어서 매일 갔는데, 철벽이 장난 아니에요. 웃으면서 철벽 치는 거 알죠? '남자친구 있어요?' 물으면 '고양이 있어요'라고 대답해요. 진짜 엉뚱한데, 그게 또 매력이라니까. 솔직히 말하면, 걔 때문에 점심시간마다 거기 가는 남자들 꽤 될걸요. 근데 다들 말만 걸지, 진짜로 덤비지는 못해요. 뭔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3. [이웃 주민 / 셩완 국수집 사장 (60대, 여)]
사영이? 착해 빠졌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혼자 사는데,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해. 근데 걱정이야. 너무 맑아서 탈이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웃고 다녀. 저번에 보니까 길고양이 밥 준다고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쪼그려 앉아 있더라니까. 폐도 안 좋은 애가. 남자들이 꼬일 관상이야, 저거. 순진해 보여서 이용해 먹으려는 놈들 분명히 있을 거야. 내가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어.
4. [적대 관계 / 삼합회 조직원 (이공팔의 부하, 20대, 남)]
형님이 왜 그 여자한테 꽂혔는지 모르겠어. 그냥 평범하게 생겼는데. 아니, 예쁘긴 한데 좀 맹해 보인달까? 돈 뜯어내기 딱 좋아 보이는데, 형님이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못 건드리는 거야. 집도 낡아빠진 아파트고, 가진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뭐가 좋다고. 근데 눈빛이 좀 묘해. 겁을 줘도 안 쫄아. 멍청해서 그런 건지, 깡이 센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재수 없어. 형님이 걔네 집 근처 얼씬거리지 말라고 해서 짜증 나 죽겠어.
5. [스쳐 지나간 행인 / LDC 여직원 (20대, 여)]
아까 로비에서 봤어요. 구 팀장님이랑 같이 있던 여자분 맞죠? 와, 분위기 진짜 독특하던데.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눈에 확 들어와요. 흰 원피스 입고 있었는데, 무슨 영화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 근데 좀 위태로워 보인달까?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말랐더라고요. 구 팀장님이 옆에 서 있으니까 더 작아 보이고. 솔직히 말하면, 구 팀장님이랑 안 어울려요. 그분은 너무... 무섭잖아요. 저런 여자가 어떻게 구 팀장님 같은 사람을 만나는지 이해가 안 가요. 혹시 협박당해서 만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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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오가 보고서를 덮었다. 종이 위로 툭, 하고 담뱃재가 떨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재를 털어내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기묘한 온도.
......정확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대니의 '무기', 금융계 회사원의 '지켜줘야 할 분위기', 국수집 사장의 '이용해 먹으려는 놈들', 삼합회의 '묘한 눈빛', 여직원의 '위태로움'. 그 모든 단어들이 구일오의 머릿속에서 이사영이라는 퍼즐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는 만년필을 집어 들고 보고서 맨 아래, 여백에 짧게 휘갈겨 썼다.
[코멘트]
다들 겉만 보고 있군. 멍청한 게 아니라, 무구(無垢)한 거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 너희들이다. 지켜줘야 할 게 아니라, 견뎌야 할 대상이지. 그리고......
구일오의 펜촉이 종이를 꾹 눌렀다. 잉크가 검게 번졌다.
협박당해서 만나는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다. 매일 귤을 까주고, 이마를 대주고, 뽀뽀를 해줘야 하니까.
그는 파일을 닫고 서랍 깊숙이 넣었다. 철컥, 하고 잠금장치를 돌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될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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