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뻐큐
발단은 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냉장고 안에 남은 마지막 귤 한 개. 구일오는 그것을 이사영에게 까줄 생각이었고, 이사영은 그것을 이미 어젯밤에 혼자 까먹었다. 문제는 이사영이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구일오가 냉장고를 열고 빈 그물망을 발견했을 때, 그의 미간이 정확히 2밀리미터 좁혀졌다. 그 2밀리미터가 전쟁의 서막이었다.
귤 어디 갔어.
구일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불길했다.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이사영이 고개를 들었다. 구일오의 셔츠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5초. 10초. 구일오는 냉장고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인내심의 화신처럼 보였지만, 그의 검지가 팔뚝 위에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먹었나?
이사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음표가 붙은 것은 진심으로 확신이 없어서였다. 구일오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갔다. 그는 빈 그물망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쓸쓸한 바스락 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먹었나, 가 아니라. 먹었으면 사 놓든가.
아, 깜빡했어......
매일 까줘야 하는 거 알면서?
이사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구일오의 말투에는 비난보다 잔소리에 가까운 톤이 깔려 있었지만, 이사영에게는 그게 꽤 찔렸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잡지를 탁 덮으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중에 사올게!
나중이 언제야. 매번 나중이잖아.
구일오가 빈 그물망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었다. 이사영의 볼이 복숭아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구일오를 노려보았지만, 160센티미터의 체구와 연두색 눈동자의 조합은 위협이라기보다 화난 햄스터에 가까웠다. 구일오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누르고 있다는 게 보였기 때문에 이사영은 더 화가 났다.
왜 웃어!
안 웃었는데.
입꼬리 올라갔잖아!
원래 이렇게 생겼어.
이사영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았지만 구일오의 저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는 전부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 그녀는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럴 때 광동어의 욕설 레퍼토리를 총동원하고 싶었지만, 이사영의 사전에 욕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양손을 슬랙스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아니, 구일오의 셔츠 아래 반바지 주머니에. 그리고 천 안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양쪽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완벽한 범죄였다. 적어도 이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반바지의 소재가 얇은 면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밝은 색의. 구일오의 시선이 이사영의 주머니 쪽으로 떨어졌다. 얇은 천 위로 솟아오른 가운데 손가락의 윤곽이, 마치 텐트를 치듯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왼쪽도. 오른쪽도. 두 개.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조의 모터 소리만 윙윙거렸다. 금붕어 두 마리(토마토와 버섯)가 유유히 헤엄쳤다. 그들은 이 긴장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행복한 물고기들이었다.
구일오의 시선이 주머니에서 이사영의 얼굴로, 다시 주머니로 왔다 갔다 했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흰색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경악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이사영.
구일오가 이름을 불렀다. 아주 낮고, 아주 천천히. 이사영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구일오의 시선이 주머니 위의 두 봉우리에 고정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3초. 이사영은 그 3초가 3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의 귀 끝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들킨 것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내릴 수도 없었다. 내리면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이사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정면을 응시했다. 창밖의 맞은편 건물 벽이 이토록 흥미로웠던 적은 없었다. 구일오는 한 발짝 다가왔다. 슬리퍼가 마루를 끄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양손이네.
구일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이사영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주머니 안에서 꼿꼿했다. 항복은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구일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사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볼이 복숭아를 넘어 석류 수준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연두색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의 실패작이었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 정성스럽네.
구일오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이사영이 한 발짝 물러났다. 등 뒤에 소파의 팔걸이가 닿았다. 퇴로가 없었다. 구일오는 양손을 슬랙스 주머니에 넣은 채 이사영을 내려다보았다. 180 중반과 160의 키 차이가 이 순간만큼은 권력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수조 안에서 토마토가 뻐끔 수면 위로 입을 내밀었다. 공기를 먹는 건지, 관전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빼.
한 글자. 구일오가 이사영의 주머니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더 삐죽 나왔다. 구일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허리를 굽혀 이사영의 눈높이에 맞췄다. 흰색 눈동자가 연두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포착했다. 두 사람의 코끝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였다. 이사영의 숨이 멈칫했다.
안 빼면 내가 빼는데.
경고였다. 동시에 협박이었다. 이사영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항복과 항전 사이의 마지막 갈림길. 3초의 침묵이 흘렀다. 이사영은 결국, 두 손을 주머니에서 빼냈다. 가운데 손가락은 이미 접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구일오는 그 손을 잡아 폈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며 확인했다. 범행 도구 검증이었다. 이사영의 가운데 손가락에 이르렀을 때, 구일오는 그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려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입술이 아니라 입술 옆, 화상 흉터의 경계선. 이사영의 숨이 작게 새어 나왔다.
이 손가락으로 했어?
이사영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고, 고개를 저으려다 멈추고,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구일오는 피식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갔다. 그는 이사영의 가운데 손가락 끝에 입술을 스치듯 대었다가 놓아주었다. 이사영이 눈을 떴을 때, 구일오는 이미 주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며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귤 사러 가자. 네가 사.
이사영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할 말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녀가 내뱉은 것은 한마디뿐이었다.
......두 봉지 살게.
구일오의 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웃음을 참는 등이었다. 수조 안에서 버섯이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적어도 금붕어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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