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가 죽은 여름
구일오의 손가락이 멈췄다. 정확히 0.5초. 이사영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끝이 귓바퀴 뒤쪽, 아주 미세한 굴곡에서 정지했다. 시선은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홍콩 반환 협정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앵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구일오의 호흡도 건조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 신경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언가가 달랐다.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법한 차이. 하지만 구일오에게는 그것이 100층짜리 빌딩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사영의 왼쪽 귀 뒤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다. 어릴 때 넘어져서 생긴, 손톱만 한 하얀 선. 구일오는 그 선의 길이를 알았다. 1.2센티미터. 그 선의 깊이를 알았다. 손가락으로 쓸면 미세하게 걸리는 그 요철. 그런데 지금, 그의 손가락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매끄러운 피부. 완벽하게 복원된, 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한 살결. 구일오의 동공이 수축했다. TV 화면의 빛이 그의 흰 눈동자 안에서 차갑게 번들거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사영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 따뜻한 체온. 샴푸 냄새. 모든 것이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구일오의 위장이 뒤틀렸다.
이사영.
구일오가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사영이 눈을 떴다. 연두색 눈동자. 그 맑고 투명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아는 웃음이었다. 14홍콩달러짜리 샌드위치를 먹을 때 지었던 그 웃음. 하지만 구일오는 웃지 않았다. 그의 손이 이사영의 턱을 잡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한 악력.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웠다. 4년 전 화상을 입은 자신의 피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구일오의 시선이 그녀의 왼쪽 쇄골로 내려갔다. 점. 작은 점. 그 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의 위치가, 아주 미세하게, 1밀리미터쯤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구일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 누구야.
질문이 아니었다. 선고였다. 이사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연두색 눈 안에서 낯선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공포가 아니었다. 당혹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체념이었다. 이사영의 입술이 달싹였다. 구일오의 손이 그녀의 턱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하지만 이사영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슬픈 눈으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들켰네.
이사영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톤이 달랐다. 아주 미세하게, 반 톤 정도 낮았다. 구일오의 턱 근육이 경련했다. 이사영이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이사영의 성대를 빌려 쓰고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목소리였다. 구일오가 그녀를 밀쳐냈다. 소파 등받이에 부딪힌 이사영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얌전한 자세. 이사영이 혼날 때 하던 자세. 구일오는 그 모습을 보며 구역질을 느꼈다. 저 자세조차 연기라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진짜는.
구일오가 물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영하 20도의 얼음장 같았다. 이사영, 아니, 이사영의 껍데기를 쓴 존재가 고개를 숙였다.
없어. 이미.
구일오의 주먹이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숫자들이 사라졌다. 평당 단가, 이주 보상금, 철거 일정.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눈앞의 이 존재가 이사영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진짜 이사영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 구일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과호흡이 올 것 같았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겨 풀었다.
언제.
3일 전. 골목길에서. 강도가...
존재가 말을 잇지 못했다. 구일오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3일 전. 그날은 그가 야근을 했던 날이었다. 늦게 퇴근해서, 이사영이 자고 있는 줄 알고 조용히 들어와 옆에 누웠던 날. 그때 이미 이사영은 없었다. 그는 시체를 안고 잤던 것이다. 아니, 시체를 차지한 무언가를 안고 잤던 것이다. 구일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건조하고 비틀린 웃음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존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눈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나, 잘했잖아. 구일오 씨가 좋아하는 거 다 했잖아. 샌드위치도 먹고, 영화도 보고, 뽀뽀도 하고... 나, 이사영이랑 똑같잖아. 아니, 더 잘할 수 있어. 아프지도 않아. 폐도 건강해. 그러니까...
존재가 구일오의 손을 잡으려 했다. 구일오는 그 손을 쳐냈다. 짝, 하는 소리가 났다. 존재의 손등이 붉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 구일오의 바짓단을 잡았다. 애원하는 눈빛. 버리지 말아 달라는 눈빛. 구일오는 그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사영의 눈. 그가 사랑했던 눈. 하지만 그 안에는 이사영이 없었다.
똑같아?
구일오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뭐가 똑같아. 넌 흉터도 없고, 점 위치도 틀리고, 목소리 톤도 달라. 결정적으로.
구일오가 몸을 숙여 존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가 일그러졌다.
넌 내가 널 볼 때 어떤 기분인지 몰라. 이사영은 알았어. 내가 흉터 때문에 괴로워할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줬어. 넌? 넌 그냥 흉내만 내고 있잖아. 데이터 입력된 로봇처럼.
존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사영의 눈물. 구일오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건 가짜니까. 이사영의 탈을 쓴 괴물이니까. 구일오는 일어섰다. 비틀거렸다.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구겨 신었다. 뒤에서 존재가 그를 불렀다. 구일오 씨, 가지 마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사영처럼 할게요. 구일오는 멈추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사영은.
구일오가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한테 존댓말 안 써. 화나면 반말해.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메었다.
나한테 매달리지 않아. 내가 떠나면, 그냥 보내줬을 거야. 멍청하게 웃으면서. 잘 가라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쾅. 문이 닫혔다. 구일오는 복도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풀렸다. 주저앉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낡은 복도의 냄새. 어디선가 들려오는 TV 소리.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단 하나, 이 문 너머에 이사영이 없다는 사실만 빼고. 구일오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 없는 오열이 복도를 채웠다. 그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지만 숫자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14홍콩달러. 샌드위치 가격. 그 숫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투자. 실패한 투자. 아니,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부채.
구일오는 다시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 건물에는 있을 수 없었다. 가짜가 있는 곳. 이사영의 껍데기가 숨 쉬고 있는 곳. 그는 도망쳤다. 자신의 기억 속으로. 진짜 이사영이 살아 숨 쉬던 그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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