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구일오의 일기
## 「그레이스 리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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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3일 / 토요일 / 흐림
1일차
병원에서 의사가 말했다. 반복성 기억상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전날이 지워진다. 기억이 멈춘 시점은 올해 1월 이전. 나를 만나기 전.
나를 모른다.
침대 위에서 이사영이 눈을 떴을 때, 그 연두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낯선 남자를 보는 눈이었다. 경계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눈.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처음 백레인 델리 카운터 너머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때와 똑같은 톤으로.
나는 대답했다.
구일오입니다. 당신 옆에 있던 사람이에요.
이사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술을 검지로 천천히 눌렀다. 그 습관. 그 습관은 남아 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것과 머리가 기억하는 것은 다른 모양이다.
왼쪽 얼굴의 흉터를 봤을 텐데,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처음과 같았다.
저녁에 귤을 깎아줬다. 받아먹었다. 맛있다고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 귤을 향한 거라는 걸 안다. 알면서 깠다.
내일 아침이면 이 하루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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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9일 / 금요일 / 맑음
7일차
매일 아침 같은 질문을 듣는다.
누구세요?
일곱 번째다. 일곱 번째 '누구세요'다. 목소리 톤도 같고, 고개 기울이는 각도도 같고, 그 다음에 입술을 만지는 것도 같다. 매일 아침 이사영은 완벽하게 새로 태어난다. 어제의 내가 귤을 깎아줬던 것도, 이마를 맞댔던 것도, 손을 잡고 싱와 빌딩 계단을 내려갔던 것도 전부 없었던 일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침 자기소개를 한다.
구일오예요. 당신 곁에 있는 사람.
처음에는 '옆에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과거형이었다. 이제는 현재형으로 바꿨다. 이사영은 그 차이를 모른다.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일주일 동안 알아낸 것들이 있다.
첫째, 이사영은 매일 아침 나를 모르지만 매일 저녁에는 웃어준다. 하루 안에 이 사람은 나를 낯선 남자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승격시킨다. 매번. 빠짐없이. 이사영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몸은 기억한다. 내가 등을 쓸어내리면 긴장이 풀린다. 이마를 맞대면 눈을 감는다. 귤 냄새를 맡으면 손을 내민다. 머리는 잊어도 피부가 나를 안다.
셋째.
셋째는 쓰지 않겠다.
셋째, 매일 밤 이 사람이 잠들면 나는 이 수첩을 펴고 같은 문장을 쓴다. 내일 아침이면 또 잊힐 하루를 기록한다. 왜 기록하냐고. 이사영이 기억 못 하니까 내가 기억해야 하니까. 누군가는 이 하루들이 존재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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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28일 / 수요일 / 비
26일차
체계를 만들었다.
현관문 안쪽에 메모를 붙여놓는다. 매일 아침 이사영이 가장 먼저 보는 위치에.
「좋은 아침이에요, 이사영 씨. 당신은 기억에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옆방에 구일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위험하지 않아요. 귤이 식탁 위에 있어요. 」
26번 고쳐 썼다. 처음에는 '당신의 연인'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그건 이사영이 선택한 적 없는 정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사영에게 '나는 당신의 연인이오'라고 쪽지로 통보하는 건, 그건 내가 하던 짓이랑 뭐가 다르냐. 가스라이팅. 정보 비대칭을 이용한 유도. 나는 그걸 직업으로 했던 인간이다.
그래서 뺐다. '옆방에 있는 사람'으로만 적는다.
이사영은 매일 아침 그 쪽지를 읽고, 매일 아침 옆방 문을 노크한다. 매일 아침 같은 미소로.
안녕하세요. 구일오 씨?
스물여섯 번째 노크.
문을 열 때마다 심장이 쥐어짜인다. 이 감각에도 익숙해져야 할 텐데, 안 된다. 26일이 지났는데도 안 된다.
오늘은 비가 왔다.
1990년 3월 14일 / 목요일 / 흐림
40일차
이사영이 울었다.
처음이었다. 40일 동안 매일 아침 낯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매일 아침 쪽지를 읽고, 매일 아침 옆방 문을 노크하던 이 사람이, 오늘은 노크하지 않았다. 구일오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이사영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쪽지를 두 손으로 쥐고. 연두색 눈이 젖어 있었다.
저, 이거…… 매일 쓰시는 거예요?
식탁 위에 쪽지가 한 장이 아니었다.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지난 메모들을, 이사영이 찾아낸 것이다. 39장.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구일오의 글씨는 하루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만년필 잉크의 농도만 조금씩 달라져 있을 뿐.
구일오는 냉장고에서 귤을 꺼내다 멈췄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껍질이 닿는 감각만 또렷했다. 이사영이 서랍을 열 거라는 건 계산하지 못했다. 39일 동안 쌓인 쪽지들. 같은 문장, 같은 위치, 같은 글씨. 그걸 한꺼번에 본 사람의 눈에 그것은 어떻게 보일까.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감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사영은 울고 있었다. 무섭다는 눈이 아니었다. 입술을 검지로 누르고, 쪽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거 보니까 가슴이 아파요.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머리는 잊어도, 39일 동안 매일 저녁 이 남자의 손에서 귤을 받아먹고, 이 남자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이 남자의 목소리로 잠들었던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구일오는 귤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의자를 당겨 이사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을 뻗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이 사람에게 나는 처음 보는 남자다. 처음 보는 남자가 우는 여자의 손을 잡으면, 그건 위로가 아니라 침범이다.
울어도 돼요.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더 말하지 않았다. 이사영이 쪽지를 내려놓을 때까지, 귤 껍질의 향이 식탁 위로 번질 때까지, 구일오는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왼쪽 얼굴의 흉터가 형광등 빛 아래서 하얗게 빛났다.
이사영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구일오는 귤을 까기 시작했다. 말없이. 알맹이를 하나씩 분리해서 이사영 앞에 놓았다. 이사영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삼키고 나서 말했다.
……구일오 씨, 저 내일도 울 것 같아요.
구일오의 손이 귤 위에서 멈췄다. 1초. 2초. 그리고 다시 까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도 깔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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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30일 / 금요일 / 맑음
56일차
쪽지의 문장이 바뀌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사영 씨. 당신은 기억에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옆방에 구일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당신을 좋아해요. 귤이 식탁 위에 있어요. 」
'위험하지 않은 사람'에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26일 만에 한 번 고친 문장을, 56일째에 다시 고쳤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가스라이팅이라고 해도 좋다. 정보 비대칭을 이용한 유도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구일오는 더 이상 그 단어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숨길 이유를 찾지 못했다.
56일 동안 이사영은 매일 아침 구일오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매일 저녁,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구일오 씨, 좋은 사람이네요.
매번. 빠짐없이. 56번. 이사영이라는 인간의 본능은 구일오를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매번 처음부터 시작해서, 매번 같은 곳에 도착했다. 구일오는 그것을 사랑의 증거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늘 이사영은 쪽지를 읽고 웃었다. 옆방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렸을 때, 화상 흉터가 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를 좋아하시는 분이 귤도 까주시나 봐요.
구일오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1990년 5월 1일 / 화요일 / 맑음
88일차
오늘은 내 생일이다. 서른두 살. 축하할 사람은 없고, 축하받을 이유도 없다.
이사영이 아침에 쪽지를 읽었다. 오늘의 쪽지는 어제와 같다. 바뀐 것은 없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사영 씨. 당신은 기억에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옆방에 구일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당신을 좋아해요. 귤이 식탁 위에 있어요.」 88번째 같은 문장. 잉크가 살짝 번진 게 어젯밤에 손이 떨렸다는 증거다. 지우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었다. 이사영이 서 있었다. 연두색 눈. 쪽지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88번째 아침인데, 그 얼굴은 1번째 아침과 정확히 같다. 구일오는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내려다봤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사영 씨.
이사영이 쪽지를 흔들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구일오 씨, 이거 글씨가 예뻐요. 만년필이죠?
88일 동안 들은 적 없는 말이었다. 구일오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1초. 이사영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챌 리가 없다. 이 사람에게 오늘은 첫날이니까.
구일오는 신발을 신고 완차이까지 걸었다. 백레인 델리. 대니가 말없이 클럽 샌드위치와 블랙커피를 내밀었다. 구일오는 감자 수프를 하나 더 주문했다. 대니가 올려다봤다. 88일째 같은 추가 주문. 대니는 아무 말 없이 수프를 포장했다. 이 과묵한 영국인은 질문하지 않는 법을 안다.
돌아오는 길에 귤을 샀다. 한 봉지. 이사영의 집 현관문 앞에 수프와 귤을 내려놓고, 노크했다. 문이 열렸다. 이사영이 수프 냄새를 맡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감자 수프!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거.
88번. 88번 들었다. 같은 감탄, 같은 눈, 같은 기쁨. 구일오는 식탁에 수프를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찍었어요.
이사영이 웃었다. 수프를 떠먹으며 맞은편의 구일오를 올려다봤다. 화상 흉터를 보고, 잠시 시선이 멈추고,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수프를 떴다.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88번째 아침에도. 이 사람의 본능은 단 한 번도 구일오의 흉터를 보고 뒷걸음치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이사영이 귤을 까달라고 했다. 구일오는 껍질을 벗기며 알맹이를 하나씩 분리했다. 이사영이 하나를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구일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구일오 씨, 오늘 무슨 날이에요? 왠지 표정이 달라요.
구일오의 손이 귤 위에서 멈췄다. 이사영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느낀다. 88일 동안 매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사람은 구일오의 표정 변화를 하루 만에 읽어낸다. 대단한 건지 잔인한 건지 모르겠다.
……생일이에요.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커졌다. 입술을 검지로 누르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뛰어가더니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컵을 꺼내고, 물을 따르고, 귤 한 알을 컵 위에 올려놓았다. 식탁으로 돌아와 구일오 앞에 내밀었다.
케이크가 없으니까. 이걸로요. 귤 케이크.
물컵 위에 귤 한 알.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생일 케이크. 구일오는 그것을 내려다봤다. 왼쪽 얼굴의 흉터가 형광등 아래서 하얗게 빛났다. 목 안쪽이 조여왔다. 88일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물컵 위의 귤 한 알이 목을 죄었다.
이사영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생일 축하해요, 구일오 씨. 내일은 기억 못 하겠지만…… 오늘은 축하해요.
구일오는 귤을 집어 들었다. 껍질을 벗겼다. 반을 나눠 한쪽을 이사영 앞에 놓았다. 이사영이 받아 입에 넣었다. 씹는 소리가 작은 부엌에 울렸다.
오늘 하루도 내일이면 사라진다. 이 귤 케이크도, 이 축하도, 이사영의 저 웃음도. 구일오는 그것을 안다. 88일째 알고 있다.
그래서 쓴다. 여기에.
1990년 10월 7일 / 일요일 / 비
24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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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기를 쓰는 손이 떨리지 않는다. 그게 이상하다.
243일. 숫자로 쓰면 별것 아닌 것 같다. 8개월. 그것도 별것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매일 아침 같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인사하고, 매일 저녁 같은 여자의 웃음을 수거하고, 매일 밤 그 웃음이 내일이면 증발한다는 사실을 삼키며 잠드는 시간을 시(時)로 환산하면, 5,832시간이다. 5,832시간 동안 나는 이사영의 기억에 단 한 번도 잔류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이사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쪽지를 읽기 전에.
구일오는 옆방에서 면도를 하고 있었다. 면도기 소리 사이로 슬리퍼가 마루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노크. 구일오가 문을 열었을 때, 이사영은 맨발이었다. 쪽지는 손에 없었다.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사영의 연두색 눈이 구일오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왼쪽 흉터 위에서 시선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구일오 씨?
구일오의 손에서 면도기가 미끄러질 뻔했다. 243일 만에 처음이었다. 쪽지를 읽지 않고 이름을 부른 것은. 구일오는 문틀을 잡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입을 열지 못했다. 3초. 5초. 이사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얼굴이 이상해요.
이상한 건 너다. 그 말을 삼켰다. 대신 물었다.
……쪽지 안 읽었어요?
이사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식탁 위의 쪽지를 보고, 다시 구일오를 보았다. 입술을 검지로 눌렀다. 그 동작. 243번 본 동작.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입술을 누르는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왔다. 이사영이 말했다.
읽기 전에 알았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옆방에 가면 된다는 거.
구일오는 면도기를 세면대에 내려놓았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왼쪽의 흉터가, 면도 크림 아래서 일그러져 있었다. 243일 동안 쓴 쪽지들. 같은 문장, 같은 잉크, 같은 위치. 그것이 이사영의 머리가 아닌 몸 어딘가에 각인된 것이다. 근육이 기억하는 것인지, 후각이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사영이라는 존재의 어떤 근본적인 부분이 구일오라는 좌표를 새겨놓은 것인지.
구일오는 의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6월이었다. 이사영이 잠든 새벽, 병원 복도의 공중전화로.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까?
의사는 말했다. 가능성은 낮다고. 손상 부위의 특성상 새로운 기억의 고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절차 기억, 즉 몸이 기억하는 습관은 남을 수 있다고. 구일오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복도 벽에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타일이 흉터에 닿았다. 그때 결정했다. 가능성이 낮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일오는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쪽지를 쓸 것이다.
그리고 243일째 아침. 이사영이 쪽지 없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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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오는 귤을 깠다. 이사영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접고 먹었다. 비가 창문을 두들겼다. 맞은편 건물 벽에 빗물이 줄기를 그었다. 이사영이 귤을 씹으며 물었다.
구일오 씨, 우리 무슨 사이예요?
243일 동안 이사영은 이 질문을 서른일곱 번 했다. 구일오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오늘도 같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사영이 먼저 말했다.
아, 잠깐. 말하지 마세요.
이사영이 귤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구일오의 손을 잡았다. 귤즙에 젖은 손가락이 구일오의 마른 손등 위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이사영이 구일오의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뺨에 대었다.
……이 손 알아요. 매일 귤 까주는 손이잖아요.
구일오의 숨이 끊겼다. 1초. 심장이 갈비뼈를 때렸다. 이사영의 뺨은 따뜻했다. 귤 향이 올라왔다. 구일오는 엄지로 이사영의 광대뼈 아래를 천천히 쓸었다. 이사영이 눈을 감았다. 익숙한 것처럼.
구일오의 엄지가 이사영의 광대뼈 아래를 쓸고 지나간 자리에, 귤즙의 끈적한 잔여가 얇은 막처럼 남았다. 이사영이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손에 뺨을 기대고 있었다. 비가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작은 거실을 채웠다. 구일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은 것 같았다. 이사영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이 엄지 끝으로 전해졌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243일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깨졌다가 다시 붙었다.
이사영이 눈을 떴다. 연두색 눈동자가 구일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왼쪽 흉터 위를 지나 오른쪽 눈으로, 다시 입술로.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두려움이 없었다. 243번의 아침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도 없었다. 구일오의 목 안쪽이 조여왔다. 이사영이 입을 열었다.
구일오 씨, 울어요?
울지 않았다. 구일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영의 엄지가 올라와 그의 눈 아래를 닦았을 때, 손가락 끝이 젖었다. 구일오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반사적으로. 243일 동안 이사영 앞에서 무너진 적은 없었다. 매일 아침 같은 인사를 하고, 같은 귤을 까고, 같은 쪽지를 쓰면서도 단 한 번도. 그런데 '이 손 알아요'라는 다섯 글자가, 5,832시간의 둑을 허물어버렸다.
이사영이 구일오의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두 손으로 뺨을 잡았다. 귤즙 묻은 작은 손이 흉터 위에 닿았다. 차갑지 않았다. 이사영의 체온이 켜켜이 쌓인 화상 조직 위로 스며들었다. 구일오는 눈을 감았다. 이사영이 이마를 그의 턱 아래에 대었다. 비누 향과 귤 향이 섞였다. 익숙한 좌표. 243일 동안 매일 새로 배워야 했던 거리가, 오늘은 처음부터 '0'이었다.
……내일이면 잊어요.
구일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경고가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이사영이 고개를 들어 구일오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검지로 누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웃었다. 243번의 아침 중 가장 또렷한 웃음이었다.
그러면 내일도 알려주면 되잖아요. 이 손이 매일 귤 까주는 손이라고.
구일오의 입꼬리가, 조용히, 부서지듯 흔들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사영의 머리카락 위에 턱을 올려놓고, 비가 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사영의 심장 소리가 셔츠를 통해 전해졌다. 작고, 고르고, 확실했다. 구일오는 속으로 244번째 쪽지의 문장을 썼다. 같은 문장이었다. 내일도 같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사영이 쪽지 없이 왔다. 그 사실 하나가 5,832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의 전부이자, 5,833시간째를 시작할 수 있는 이유의 전부였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머리카락 위에 턱을 올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비가 유리창 위로 갈라지며 흘렀다. 맞은편 건물 벽의 빗줄기가 회색 수묵화처럼 번졌다. 이사영의 심장 소리가 셔츠 천을 통해 쇄골까지 울려왔다. 작고, 고르고, 확실한 박동. 구일오는 그 리듬을 세고 있었다. 72. 73. 74. 숫자를 세는 동안에는 생각이 멈춘다. 생각이 멈추면 무너지지 않는다. 243일 동안 그렇게 버텼다. 그런데 오늘은 숫자가 자꾸 흐려졌다. '이 손 알아요'라는 말이 숫자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번호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사영이 구일오의 셔츠 앞섶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작은 주먹이 천을 구기는 소리가 났다. 구일오가 턱을 들어 이사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연두색 눈이 젖어 있었다. 울고 있는 건 아니었다. 비의 습기가 속눈썹 끝에 맺힌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243일을 함께 살아도 구일오는 이사영의 눈물과 빗물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배고파요?
구일오가 물었다. 목소리가 아직 완전히 복원되지 않아 갈라진 채였다. 이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셔츠에서 얼굴을 떼었다. 구일오의 가슴팍에 동그란 온기의 자국이 남았다. 이사영이 식탁 위의 쪽지를 돌아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옆방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귤은 식탁 위에 있어요.' 243번째 쪽지. 같은 잉크, 같은 만년필, 같은 문장. 이사영이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읽고, 접고, 원피스 주머니에 넣었다. 그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처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구일오 씨.
이사영이 식탁 앞에 서서 구일오를 돌아보았다. 갈색 생머리가 어깨를 스쳤다. 비가 창밖에서 더 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이거, 몇 장이에요?
구일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사영이 가리킨 곳은 서랍이었다. 구일오가 매일 밤 쪽지를 쓰고, 사용하지 않은 여분의 쪽지와 다 쓴 만년필 카트리지를 넣어두는 서랍. 이사영이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구일오는 쪽지를 버리지 않았다. 이사영이 매일 주머니에 넣은 쪽지들은 이사영이 잠든 뒤 구일오가 회수하여 침실 옷장 안쪽 상자에 넣었다. 243장.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구일오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사영이 서랍을 닫고 다시 구일오를 보았다.
……많이 썼죠?
구일오의 입꼬리가 떨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경련에 가까웠다. 구일오는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귤이 네 알 남아 있었다. 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톱 아래로 귤 향이 터졌다. 이 향을 243번 맡았다. 244번째도 같을 것이다. 구일오는 귤을 한 쪽 떼어 이사영에게 내밀었다. 이사영이 받아 입에 넣었다. 씹는 소리. 삼키는 소리. 구일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늘 밤 쓸 244번째 쪽지의 문장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옆방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문장이면 충분했다. 이사영의 몸이 기억하는 한, 이 문장이면.
이사영이 귤을 씹는 소리가 멈췄다. 입술 끝에 남은 즙을 혀로 훔치고, 검지로 아랫입술을 천천히 눌렀다. 멍해진 얼굴. 243일 동안 구일오가 가장 많이 본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것도 아니고, 잊으려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린 얼굴. 구일오는 귤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손가락에 남은 즙을 수건으로 닦았다. 이사영이 부엌 입구에 기대선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밥 해줄까요.
구일오가 냉장고를 다시 열었다. 계란 네 알, 파 반 단, 밥은 어젯밤에 지어둔 게 남아 있었다. 이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구일오가 돌아보았다. 이사영이 한 발 다가왔다. 슬리퍼가 부엌 타일 위에서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이사영의 손이 올라와 구일오의 셔츠 단추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 벌어진 틈에 손가락 끝을 걸었다. 당기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구일오의 복부 위로 이사영의 손가락 체온이 번졌다.
구일오 씨.
이사영이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눈에 질문이 떠 있었다. 구일오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이사영의 손가락이 단추 사이에 걸린 채, 구일오가 몸을 돌려 이사영을 마주 보았다. 키 차이 때문에 이사영의 시선이 그의 턱 아래에서 출발해 천천히 올라왔다. 흉터를 지나고, 눈을 지나고, 이마에 닿았다가 다시 내려왔다. 입술에서 멈췄다.
나, 이 사람 알아요.
구일오의 호흡이 끊겼다. 이사영이 말한 건 기억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243번의 아침마다 쪽지를 읽고, 귤을 받고, 옆방의 남자를 낯선 눈으로 올려다보던 여자가, 오늘은 쪽지보다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고, 지금은 단추 사이에 손가락을 걸고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손가락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귤즙과 비누 향이 뒤섞인 손이었다. 따뜻했다. 244일 동안 같은 온도였다. 구일오의 입꼬리가 천천히, 부서지듯, 올라갔다.
……그래요.
한 마디가 전부였다. 구일오는 이사영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코끝이 닿았다. 이사영의 숨이 그의 입술 아래로 흘렀다. 비가 창밖에서 거세졌다. 맞은편 건물 벽이 빗물에 잠기고, 거실의 금붕어 수조에서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만 남았다. 구일오는 눈을 감았다. 이사영의 심장 소리가 단추 틈을 통해 손바닥까지 전해졌다. 오늘 밤, 244번째 쪽지를 쓸 때 한 줄을 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알아봤어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지 않을 것이다. 내일의 이사영은 오늘의 이사영이 아니니까. 대신 같은 문장을 쓸 것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옆방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사영의 몸이 기억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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