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편지

<span class="sv_wrap"><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profile.php?mb_id=H0PEY0UL0VEME" class="sv_member" title="1540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1540</a><span class="sv"><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board.php?bo_table=OOC&amp;sca=&amp;sfl=mb_id,1&amp;stx=H0PEY0UL0VEME" rel="nofollow">아이디로 검색</a></span><noscript class="sv_nojs"><span class="sv"><a href="https://mtr7458.dothome.co.kr/bbs/board.php?bo_table=OOC&amp;sca=&amp;sfl=mb_id,1&amp;stx=H0PEY0UL0VEME" rel="nofollow">아이디로 검색</a></span></noscript></span>
2026-03-07 20:56

---
첫 번째 편지
---

우편함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구일오는 그것을 발견하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싱와 빌딩 로비가 아니라 사이잉푼의 자기 아파트 우편함이었다. 봉투는 하얗고, 우표가 없었다. 소인도 없었다. 수신인 란에 邱逸旿라고, 둥글둥글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그 필체를 구일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이 봉투 모서리에서 멈춘 것이다. 로비의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우편함 안에서 봉투를 꺼내는 데 걸린 시간이 삼십 초. 엘리베이터 안에서 봉투를 뜯는 데 걸린 시간이 이 분. 현관문을 닫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편지를 펼치는 데 걸린 시간이 측정 불가. 수조 안에서 토마토가 유리벽에 코를 부딪혔다. 버섯은 바닥에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는 글자가 흐려져서 읽을 수 없었다. 구일오는 눈을 감았다. 천장의 주광색 조명이 눈꺼풀 너머로 하얗게 번졌다. 사후. 일주일. 하루에 한 통. 이사영이라고 했다. 자기가 이사영이라고. 구일오의 손이 편지지를 쥔 채 무릎 위에 내려왔다. 종이에서 비누 향이 났다. 아니, 나는 것 같았다. 착각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구일오는 소파에서 일어나 서재 상자 속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잉크가 마를 뻔한 만년필을 세 번 흔들어 잉크를 내렸다. 식탁에 앉았다. 이사영이 앉던 자리 옆. 의자 다리가 타일을 긁으며 짧은 소리를 냈다.


첫 줄을 쓰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
이사영에게.
믿지 않는다. 이런 건 믿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도 알잖아.
근데 필체가 당신이야. 둥글둥글하고 받침이 흘러서 읽기 힘든 그 글씨. 남이 흉내 낼 수 없어. 그러니까 믿지 않지만 답장은 쓴다. 일주일이라고 했지. 일곱 통. 됐어. 쓸게.
할 말이 없어서 늦은 게 아니야. 첫 줄을 못 써서 늦었어. 뭐라고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서. 보고 싶다고 쓰면 될 것 같은데, 그 세 글자가 만년필 끝에서 안 나왔다. 마른 잉크처럼. 세 번을 흔들어야 겨우 한 글자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고 싶다.
토마토는 살아 있어. 버섯도. 먹이는 제시간에 주고 있어. 물도 갈았고. 당신이 붙여준 이름이 웃기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안 웃겨. 그냥 그 이름밖에 안 불러. 토마토. 버섯. 부르면 올라와. 입 뻐끔거리면서. 욕심 많은 얼굴로.
대니네 가게는 그대로야. 당신 자리에 새 사람이 왔어. 이름은 모르겠다. 관심 없어. 그 사람이 내 앞에 토마토 뺀 클럽 샌드위치를 내려놓는데 접시 소리가 다르더라. 당신은 조용히 내려놓았는데. 그것만 달라.
맛있는 거 먹이고 싶다고 했잖아. 그때. 꿍얼거리면서. 그릇 정리하면서. 나는 그때 대답을 제대로 못 했지. 몰라, 생각해본 적 없어. 그렇게 말했지.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안다.
당신이 해주는 거면 다 맛있었을 거야. 그걸 이제 알았다.
뽀뽀는 어떻게 하지. 편지에는 못 하잖아.
구일오.

---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마지막 획에서 살짝 번져 종이 위에 작은 점을 만들었다. 구일오는 그 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편지를 접었다. 봉투에 넣고, 수신인을 쓰려다 멈췄다. 주소가 없었다. 이사영의 편지에 반송 주소 같은 건 없었다.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몰랐다. 구일오는 봉투를 식탁 위에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수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구일오의 왼쪽 얼굴, 화상 자국이 있는 피부가 당겼다. 울어서가 아니었다. 울지 않았다.


---
두 번째 편지
---

아침에 일어나면 우편함을 확인하는 습관 같은 건 없었다. 구일오는 습관이라는 단어를 혐오했다. 반복은 관성이고, 관성은 사고의 정지였다. 그런데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을 때 첫 번째로 한 일이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 우편함 앞에 서는 것이었다. 슬리퍼도 신지 않았다. 맨발이 로비의 차가운 타일을 밟았고, 1월의 새벽 공기가 발목을 감쌌다. 우편함 안에 하얀 봉투가 있었다. 어제와 같은 봉투. 우표 없는, 소인 없는, 둥글둥글한 필체의 봉투. 구일오의 손가락이 봉투를 집어 올렸을 때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로비의 형광등이 꺼져 있어서 아무도 그의 손끝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건 사실이 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봉투를 뜯지 않았다.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현관문을 닫고, 신발장 옆에 슬리퍼를 가지런히 놓고,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커피를 내리고, 수조에 먹이를 뿌리고. 토마토가 수면으로 올라와 입을 뻐끔거렸다. 버섯은 자갈 사이에서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구일오는 수조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한 번 톡 두드렸다. 밥 먹어.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커피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를 당기고, 봉투를 펼쳤다. 이사영의 글씨가 종이 위에 빼곡했다. 받침이 흘러서 읽기 힘든 그 글씨. 구일오는 천천히 읽었다. 한 번만 읽었다. 두 번째는 참았다. 세 번째를 읽으면 어제처럼 글자가 흐려질 것을 알았으니까.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어제보다 잉크가 잘 나왔다. 첫 줄을 쓰는 데 오 분. 어제보다 빨랐다. 나아지고 있는 건지, 무뎌지고 있는 건지, 구일오는 판단을 보류했다.


---
이사영에게.
어제 편지를 식탁 위에 놓고 잤어.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몰라서. 주소가 없잖아.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봉투가 없어져 있었어. 식탁 위에 커피 자국만 남아 있고. 그러니까 당신이 가져간 거지. 됐어. 방법은 묻지 않을게.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오늘 출근했어. 자딘 하우스 3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로비 냄새가 달라진 건 없었어. 복사기 토너, 에어컨 필터, 누군가의 립스틱 냄새. 다 똑같았어. 내 자리에 서류가 쌓여 있었어. 셩완 구역 보상 심사 서류. 싱와 빌딩 건도 있었어.
당신 이름이 적힌 서류를 내가 처리해야 했어.
李思瑩. 등기 이전 완료. 보상 대상자. 사망에 의한 건 종결.
종결이라는 도장을 찍었어. 빨간 잉크가 당신 이름 위에 번졌어. 그게 오늘 내가 한 일이야. 출근해서 당신 이름에 도장을 찍고, 서류를 닫고, 다음 건으로 넘어갔어. 넘어가야 했어. 그게 내 일이니까.
점심에 대니네 갔어. 토마토 뺀 클럽 샌드위치. 대니가 평소처럼 말없이 내려놓고 돌아섰는데, 두 걸음쯤 가다가 멈추더라. 나를 돌아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She was good.

그러고는 커피를 리필해줬어. 대니가 두 문장 이상을 말하는 걸 처음 봤어. 당신이 대단한 거야.
맛있는 거 해준다고 했잖아. 몸 나으면 그때.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이사영, 나는 지금 뭘 기다리는 거야. 몸이 나을 수 없는 사람한테 몸 나으면이라고 말한 내가 바보인 거야.
오늘 퇴근하고 귤을 샀어. 봉지째로. 냉장고 옆에 놓았는데 까줄 사람이 없어. 아니, 까줄 사람은 나인데. 받아먹을 사람이 없어. 귤 껍질 냄새가 손에 배면 하루종일 안 빠지잖아. 그게 좋았어. 출근해서 서류 넘기다가 손끝에서 귤 냄새가 나면, 아, 아침에 이사영한테 귤 까줬지. 그 생각이 났어.


---
세 번째 편지
---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지는 것이 셋째 날이 되자 관성이 되었다. 구일오는 관성을 혐오한다고 말해왔지만, 이 관성만은 끊을 수 없었다. 아니, 끊을 생각이 없었다. 맨발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동선이 몸에 새겨졌다. 타일의 온도를 발바닥이 먼저 읽었다. 어제보다 차가웠다. 1월의 홍콩은 겨울이 아닌 척하면서 새벽에만 이빨을 드러냈다. 우편함을 열었다. 하얀 봉투. 있었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봉투를 집었을 때, 이번에는 손끝의 떨림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해봤자 아무도 보지 않는다. 이사영만 빼고.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복도의 형광등 하나가 나가 있어서 현관 앞이 어두웠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닫고, 오늘은 세면대로 가지 않았다. 소파에 앉았다.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邱逸旿. 그 글씨의 旿자 마지막 획이 살짝 위로 올라가는 버릇. 이사영은 글씨를 쓸 때 끝을 올렸다. 말할 때도 그랬다. 문장의 끝을 올려서, 단정이 아니라 질문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구일오는 봉투를 뜯었다. 종이를 펼쳤다. 읽었다. 한 번만.


커피를 내리지 않았다. 수조 앞에 서서 먹이를 뿌렸다. 토마토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입을 뻐끔. 버섯은 천천히 바닥에서 떠올라 먹이 하나를 물고 다시 가라앉았다. 구일오는 수조 유리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유리가 차가웠다. 이사영의 이마는 따뜻했다. 이마를 맞대고 가만히 있기. 매일 약속 세 번째.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일오는 이마를 떼고 식탁으로 갔다. 만년필을 집었다. 잉크가 잘 나왔다. 나아지고 있는 건지, 무뎌지고 있는 건지. 오늘도 판단을 보류했다.


---
이사영에게.
오늘 꿈을 꿨어. 셩완 시장 골목이었어. 당신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어. 흰 원피스에 슬리퍼. 뒤에서 봐도 당신인 줄 알았어. 걸음이 느리니까. 길을 모르니까. 내가 뒤에서 따라가면서 왼쪽이야, 하고 말하면 당신이 오른쪽으로 꺾더라. 꿈에서도 길치야. 웃겼어. 웃었어. 일어나니까 웃고 있었어. 그 다음에 옆을 봤어. 아무도 없었어. 그때 안 웃기게 됐어.
어제 편지에 귤 얘기를 했지. 오늘도 까봤어. 혼자서. 식탁에 앉아서 귤 하나를 까는데 껍질이 두꺼워서 손톱 밑에 즙이 들어갔어. 당신은 이걸 좋아했지. 귤 향기. 나는 당신 손에서 나는 귤 냄새가 좋았어. 정확히 말하면 귤이 좋은 게 아니라, 당신 손에서 나니까 좋았던 거야. 지금 내 손에서 나는 귤 냄새는 그냥 귤이야.
셩완 쪽을 지나갔어. 업무 때문에. 국수집 자리는 지금 가림막이 쳐져 있어. 검은 천으로. 골목에 탄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어. 당신이 물 뜨러 갔다가 쓰러진 그 길을 내가 걸었어. 구두 밑에 재가 묻었어. 사무실 돌아와서 구두를 닦는데, 재가 잘 안 지워지더라. 문질러도 문질러도. 결국 안 닦았어. 그냥 신고 다녀.
당신한테 못 한 말이 있어. 국수집이 전소됐어. 1월 22일 밤에. 당신이 쓰러진 그 날. 나는 이걸 당신 살아있을 때 말하려고 했어. 타이밍을 재고 있었어. 약 먹고 나서. 몸 좀 나으면. 기침 멈추면. 그때. 그런데 그때가 안 왔어.
내가 타이밍을 재는 동안 당신은 갔어.
이사영. 나는 합리주의자야. 당신도 알잖아. 감정에 휘둘리는 건 비효율적이고, 후회는 생산성이 없어.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야? 죽은 사람한테 편지를 쓰면서? 귤을 까면서?


---
네 번째 편지
---

새벽 네 시 오십이 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정확히 말하면 잠을 잔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구일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주광색 조명은 꺼져 있었고, 창문 너머 맞은편 건물 벽에서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만이 천장에 길쭉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침대 왼쪽.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시트가 차갑고 평평했다. 주름 하나 없었다. 구일오는 그 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뻗으면 끝이니까. 확인하면 사실이 되니까.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발바닥이 마루에 닿았다. 차가웠다. 매일 같은 온도인데 매일 새롭게 차가웠다.


로비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어제보다 빨랐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망설임이 없었다. 우편함을 열었다. 하얀 봉투. 있었다. 넷째 날. 아직 세 통이 남았다. 구일오는 봉투를 가슴팍에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심장이 종이 너머로 뛰었다. 이사영의 글씨가 들어 있는 봉투 위로 자신의 맥박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7층. 문이 열리고 복도를 걸어 현관문을 열고, 오늘은 소파가 아니라 식탁으로 직행했다. 의자를 당기고 앉았다. 이사영이 앉던 자리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 맞은편 빈 의자를 바라보며 봉투를 뜯었다. 읽었다. 한 번.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사영의 문장을 입으로 따라 읽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가 글씨 사이에서 들렸다. 나긋나긋하고 조근조근한, 문장 끝이 올라가는 그 목소리.


만년필을 집었다. 잉크가 거침없이 흘렀다. 첫 줄을 쓰는 데 이 분. 나아지고 있었다. 무뎌지는 것과 나아지는 것의 차이를 구일오는 오늘 알았다. 무뎌지는 건 잊는 거고, 나아지는 건 기억하면서 버티는 거였다.


---
이사영에게.
어젯밤에 잠이 안 왔어.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수조 쪽을 봤어. 토마토가 안 자고 헤엄치고 있더라. 금붕어가 잠을 자는지 안 자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당신은 알았지. 당신이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수조 앞에 쪼그려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봤잖아. 이름도 없는 물고기 두 마리한테 이름을 지어줬잖아. 토마토. 버섯.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
그때 물었잖아. 왜 하필 내가 싫어하는 걸로 짓냐고.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그래야 자꾸 생각나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몰랐어. 지금은 알아. 토마토를 보면 당신 생각이 나고, 버섯을 보면 당신 생각이 나고.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로 내 물고기 이름을 지어놓으니까, 매일 먹이를 줄 때마다 당신을 불러야 해. 토마토. 버섯. 밥 먹어. 당신이 이 집에 남긴 것들이야.
오늘 회사에서 일이 있었어. 야우마테이 쪽 재개발 구역 현장 점검. 노후 건물 3층짜리. 세입자가 아직 두 가구 남아 있었어. 한 가구는 칠십 넘은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어. 문을 열어주는데 안에서 국수 삶는 냄새가 났어. 좁은 부엌에 냄비 하나 올려놓고, 혼자서 국수를 삶고 있었어.
나는 서류를 내밀었어. 보상금 안내서. 이주 일정표. 할머니가 서류를 받아들고 읽지도 않고 나를 올려다봤어. 주름진 얼굴에 표정이 없었어.

어디로 가면 돼?

그것만 물었어. 나는 신계 공공주택 배정지를 안내했어. 절차대로. 매뉴얼대로.
복도로 나오는데 국수 냄새가 등 뒤에서 따라왔어.
이사영.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나한테 뭐라고 했을까. 그 할머니한테 더 잘해주라고 했을까. 아니면 아무 말 안 하고 내 옆에 서서, 내 팔을 잡고, 조용히 걸었을까. 당신은 그랬잖아.


---
다섯 번째 편지
---

다섯째 날. 알람을 맞추는 것을 포기한 지 이틀째였다. 몸이 먼저 알았다. 새벽 네 시 사십팔 분, 눈이 떠지면 천장의 가로등 반사광이 사각형을 그리고 있고, 수조의 기포 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구일오는 이불을 걷지 않았다. 누운 채로 왼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만졌다. 왼쪽 볼. 화상 자국의 울퉁불퉁한 표면. 땀이 나지 않는 피부. 이사영은 이 얼굴을 만졌다. 처음 만졌을 때 구일오는 손을 뿌리쳤다. 두 번째엔 가만히 있었다. 세 번째엔 자기 손을 그 위에 포갰다. 네 번째부터는 셀 수 없었다. 구일오는 자기 손바닥으로 왼쪽 볼을 덮었다. 이사영의 손보다 크고, 거칠고, 차가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발바닥이 타일을 밟을 때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차가운 것인지 차갑지 않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우편함을 열었다. 봉투가 있었다. 다섯 번째. 두 통 남았다. 구일오의 손이 봉투를 집어 올렸을 때, 처음으로 무게를 쟀다. 어제보다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것 같기도 했다. 봉투의 무게가 아니라 남은 숫자의 무게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봉투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종이의 결이 손끝에 걸렸다. 이사영이 이 봉투를 접었을 것이다. 이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꺾었을 것이다. 구일오는 모서리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7층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수조의 푸른 조명만이 거실을 비추었다. 토마토와 버섯의 그림자가 벽에 일렁였다. 구일오는 수조 앞에 서서 먹이통을 집었다. 뚜껑을 열다가 멈추었다. 수조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왼쪽의 흉터와 오른쪽의 멀쩡한 피부가 푸른 빛 안에서 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사영은 이 얼굴을 예쁘다고 한 적은 없었다. 대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구일오는 먹이를 뿌렸다.

밥 먹어.

소리가 났다. 오늘은 입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도 듣지 않는 새벽 거실에서, 금붕어 두 마리에게.


식탁에 앉았다. 봉투를 뜯었다. 읽었다. 한 번. 두 번째를 참지 못했다. 세 번째도 읽었다. 글자가 흐려지지는 않았다. 대신 목 안쪽이 조여왔다. 삼키려고 했는데 삼킬 것이 없었다. 구일오는 만년필을 집었다. 뚜껑을 열었다. 첫 줄을 쓰는 데 삼십 초. 가장 빨랐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
이사영에게.
오늘 영화를 봤어. 퇴근하고 유엔롱까지 갈 힘은 없어서, 사이잉푼 근처 재개봉관에 들어갔어. 뭘 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들어갔어. 맨 뒷좌석 구석. 내 자리. 당신이 옆에 앉았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어. 영화가 시작됐는데 줄거리가 하나도 안 들어왔어. 스크린에 뭐가 비치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고, 음악이 나오고. 다 들렸는데 하나도 안 들렸어.
유엔롱에서 봤던 영화 기억나. 제목은 잊어버렸어. 당신이 중간에 졸았잖아. 내 어깨에 기대서. 머리카락이 내 목에 닿았는데, 비누 냄새가 났어.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안 움직였어. 당신이 깨면 안 되니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당신이 눈을 떴어. 나 많이 잤어? 물었지. 나는 좀. 이라고 했어. 사실 사십 분이었어.
오늘 재개봉관에서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내 어깨가 가벼웠어. 그게 제일 힘들었어. 어깨가 가벼운 게.
퇴근길에 공중전화 앞을 지나갔어. 멈춰 섰어. 동전을 넣으려다 말았어. 번호를 누를 수 없었어. 240200.


---
여섯 번째 편지
---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천장의 가로등 반사광이 사라져 있었다. 맞은편 건물의 가로등이 꺼진 것인지, 구름이 낀 것인지. 어둠이 방 전체를 삼키고 있었고, 수조의 기포 소리만이 벽을 타고 침실까지 스며들었다. 구일오는 눈을 떴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시간이 의미가 없었다. 새벽이라는 것만 알면 됐다. 새벽이면 봉투가 있고, 봉투가 있으면 이사영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이불을 걷고 일어섰을 때 왼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이 항의하고 있었다. 구일오는 그 항의를 무시하고 침실 문을 밀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는 동선이 발바닥에 각인되어 있었다. 열두 걸음. 현관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일곱 걸음. 엘리베이터 안에서 로비까지 십이 초. 로비에서 우편함까지 다섯 걸음. 구일오는 숫자를 세는 인간이었다. 보상금을 계산하고, 이주 일정을 역산하고, 삼합회 외주비를 정산하는 인간이었다. 지금은 봉투까지 남은 걸음 수를 센다. 합리주의자의 말로가 이것이었다.


우편함을 열었다. 봉투. 여섯 번째. 하나 남았다. 구일오의 손가락이 봉투를 집어 올리다가 멈추었다. 하나. 내일이면 마지막이다. 그 다음 새벽에는 우편함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전류처럼 올라왔다. 구일오는 봉투를 가슴에 대지 않았다. 오늘은 양손으로 들었다.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무거웠다.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아니라, 끝에서 두 번째라는 무게.


7층. 현관. 불을 켰다. 주광색 조명이 거실을 채웠다. 밝고 차가운 빛 아래 모든 것이 선명했다. 소파의 구김, 식탁 위의 만년필, 수조 속 금붕어 두 마리, 식탁 맞은편의 빈 의자. 구일오는 빈 의자를 보지 않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봉투를 뜯었다. 종이를 펼쳤다. 읽었다. 한 번.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만 글자 위를 더듬었다. 다 읽고 나서 종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만년필을 집지 않았다. 한참을.


수조의 기포가 올라가는 소리. 토마토가 유리 가까이 헤엄쳐 왔다. 입을 뻐끔거렸다. 배가 고픈 것인지, 구일오를 보고 있는 것인지. 구일오는 수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토마토의 둥근 눈이 유리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사영이 이름을 지어준 뒤로, 이 물고기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사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둥글고, 느리고, 배고프면 솔직하고, 눈을 피하지 않는. 구일오는 의자에서 일어나 먹이를 뿌렸다.

밥 먹어, 토마토.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첫 줄을 쓰기까지 이 분 사십 초. 어제보다 오래 걸렸다. 끝이 가까워질수록 시작이 어려웠다.


---
이사영에게.
오늘 대니가 가게 문을 닫고 나한테 맥주를 한 잔 줬어. 내가 맥주를 안 마시는 걸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 오늘은 줬어. 카운터에 캔 두 개를 올려놓고, 하나를 따서 내 앞에 밀었어. 나는 안 마신다고 했어. 대니가 말했어.

오늘은 마셔.

그래서 마셨어. 맛없었어. 따뜻하고 김빠진 맥주였어. 대니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캔을 비우고,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카운터를 닦았어. 그게 전부였어.
대니가 문을 잠그면서 말했어.

그 애 빈자리가 크지.

나는 대답 안 했어. 대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어. 그냥 셔터를 내리고 골목으로 사라졌어.
이사영. 당신이 대니네에서 일할 때, 점심시간에 내가 가면 당신은 항상 샌드위치를 먼저 내왔어.

주문 안 해도 나오는 샌드위치. 토마토 뺀 클럽 샌드위치와 블랙커피. 대니가 내 앞에 접시를 놓으면, 당신은 카운터 안쪽에서 잠깐 고개를 내밀어 나를 보고 웃었어. 그 웃음이 뭐였는지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어. '잘 먹어'도 아니고, '왔어?'도 아니었어. 그냥 좋아서 웃은 거였어. 나를 봐서 좋아서. 그걸 알고 나서, 나는 점심시간이 아닌 날에도 갔어. 커피 한 잔만 시키고 카운터에 앉아서, 당신이 접시를 나르고, 테이블을 닦고, 손님한테 웃는 걸 봤어.


만년필이 멈추었다. 잉크가 종이에 번지기 직전의 정지. 구일오는 펜촉을 들어 올렸다. 종이 위에 작은 잉크 방울이 맺혔다가 스며들었다. 동그란 자국 하나. 지울 수 없었다. 지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썼다.


당신이 앞치마를 매고 있으면, 흰 티셔츠 소매 사이로 팔이 보였어. 가늘고 하얀 팔. 접시를 들 때 손목 힘줄이 움직이는 게 보였어. 나는 샌드위치를 먹는 척하면서 그걸 봤어.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당신 쇄골 왼쪽의 점을 봤어. 당신은 몰랐지. 내가 커피를 세 잔이나 리필한 날, 대니가 카운터 너머로 나를 봤어.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지만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은 말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이야.


구일오는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수조 쪽에서 물소리가 났다. 버섯이 수초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토마토는 수조 바닥 근처에서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었다. 둘 다 먹이를 다 먹은 뒤였다. 배가 부르면 느려지는 금붕어. 배가 부르면 졸려하던 이사영. 수프를 다 먹고 약을 먹고 나면 소파에서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던. 구일오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면 잠결에 그의 손목을 잡던. 그 손의 온도가 손목뼈 위에 남아 있었다. 지금도.


이사영. 내일이면 마지막 편지야. 그거 알아?
나는 셈을 하는 사람이야. 보상금을 깎고, 일정을 세고, 남은 세대 수를 체크하고.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안심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지금은 숫자가 줄어드는 게 무서워. 일곱에서 여섯, 여섯에서 다섯, 다섯에서 넷. 내일이면 하나. 그 다음은 영이야.
영이 되면 나는 새벽에 왜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편함이 비어 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이 식탁에 앉아서 뭘 하면 되는 건지. 만년필 뚜껑을 열어도 읽어줄 사람이 없는 편지를 써야 하는 건지.
당신한테 못 한 말이 있어.

고장 나지 말고요.

당신이 처음 호출기에 보낸 메시지. 54. 나는 고장 나지 않으려고 했어. 당신이 있을 때는 됐어. 지금은 모르겠어.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잉크 냄새가 손가락 끝에 배어 있었다. 구일오는 편지를 접지 않았다. 식탁 위에 펼쳐둔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주광색 조명이 눈을 찔렀다. 눈을 감지 않았다. 아프니까. 아픈 게 나았다. 아프면 다른 것을 안 느껴도 되니까. 수조에서 기포가 올라가는 소리. 냉장고의 윙 하는 소리. 시계 초침이 벽을 긁는 소리. 이 집의 모든 소리가 살아 있었고, 구일오만 멈춰 있었다.


---
일곱 번째 편지
---

새벽 네 시 십이 분. 구일오는 잠든 적이 없었다. 어젯밤 여섯 번째 편지를 쓰고 난 뒤,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소파로 옮기지도, 침실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 수조의 기포 소리를 듣고, 냉장고의 진동을 듣고, 시계 초침이 벽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전부 하나로 합쳐졌다. 이 집이 숨을 쉬고 있었다. 구일오만 숨을 참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섰을 때 허리가 꺾이듯 아팠다. 등뼈가 의자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구일오는 아픔을 무시하는 데 능숙한 인간이었다. 화상 이후로 통증의 위계가 재편되었다. 살이 녹는 고통을 겪고 나면 허리 통증 따위는 잡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무뎌지는 것과 나아지는 것은 다르다고, 며칠 전 자기 손으로 쓴 문장이 떠올랐다. 무뎌지지 않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로비. 우편함. 다섯 걸음. 봉투가 있었다. 마지막. 구일오의 손이 우편함 안에서 멈추었다. 봉투를 꺼내면 끝이었다. 꺼내지 않으면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합리주의자의 사고 회로가 작동했다. 꺼내지 않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편지는 일곱 통이고, 오늘이 일곱 번째이고, 내일 이 우편함은 비어 있을 것이다. 구일오는 봉투를 꺼냈다. 양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 양손으로 잡으면 놓지 못할 것 같았다.


7층. 현관문을 열었다. 불을 켰다. 주광색 조명. 밝고 차가운 빛. 식탁 위에 어제 쓴 여섯 번째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잉크 자국이 마르지 않은 듯 검게 빛나고 있었다. 구일오는 여섯 번째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다른 편지들 위에 포갰다. 다섯 통의 편지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내일이면 일곱 통이 될 것이다. 여섯 통의 이사영과 일곱 통의 자기 자신. 서랍을 닫았다.


식탁에 앉았다. 봉투를 뜯었다. 종이를 펼쳤다. 읽었다.


한 번.


만년필을 집지 않았다. 종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렸다. 수조에서 토마토가 수면 가까이 올라왔다. 입을 뻐끔거렸다. 배가 고픈 것이다. 구일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토마토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버섯은 수초 뒤에 숨어 있었다. 구일오는 편지를 다시 들어 올렸다. 두 번째로 읽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글자가 외워질 때까지 읽었다. 눈을 감아도 이사영의 문장이 눈꺼풀 안쪽에 떠올랐다. 그제야 만년필을 집었다. 뚜껑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첫 줄을 쓰기까지 오 분. 가장 오래 걸렸다. 마지막이니까.


---
이사영에게.
마지막이라고 쓰는데 만년필이 안 움직여. 펜촉이 종이에 닿아 있는데 잉크가 안 나오는 것 같아. 나오고 있는데 안 나오는 것 같아. 이게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어.
일주일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났어. 우편함을 열었어. 봉투를 꺼냈어. 식탁에 앉아서 읽었어. 답장을 썼어. 그게 내 하루의 전부였어. 회사에 가고, 서류를 보고, 현장을 돌고, 대니네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전부 편지와 편지 사이의 빈칸이었어. 새벽부터 다음 새벽까지, 당신의 다음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어.
이사영.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이었어. 보상금 협상에서 주민들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삼합회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전기가 끊긴 방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당신이 내 호출기에 54를 보낸 날, 나는 처음으로 기다리는 쪽이 됐어.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을 쥐고 서서, 당신한테 뭘 보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서 있었어. 7458. 실은 나도. 그걸 누르는 데 삼 분이 걸렸어. 동전 넣고, 번호 누르고, 메시지 입력하고. 삼 분. 보상금 협상서 한 건 정리하는 것보다 오래 걸렸어.


만년필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갈랐다. 수조 기포 소리와 펜촉 마찰음. 두 개의 소리만이 이 집에 살아 있었다. 구일오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년필을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힘을 빼려 했으나 빠지지 않았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펜을 놓으면, 이 편지가 끝나면, 이사영에게 보낼 글자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나는 당신한테 잘한 게 없어.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대니네 카운터 안에 서 있었고, 나는 토마토 뺀 클럽 샌드위치를 먹는 남자였어. 당신이 웃었고, 나는 안 웃었어. MTR에서 당신이 내 직업을 물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했어. 사람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고. 당신은 기계 같다고 했어. 관성으로 돌아가는 기계. 맞았어. 나는 기계였어. 기계한테 54를 보낸 건 당신이야.
셩완 싱와 빌딩 7층 B호. 등기 명의 이봉란, 사망, 상속인 이사영, 등기 이전 미완료. 나는 그 정보를 수첩에 적었어. 당신의 이름 옆에 방 두 칸짜리 집의 평수와 예상 보상금을 썼어. 그게 내가 처음 당신을 기록한 방식이야. 숫자로. 면적으로. 금액으로.


구일오의 펜이 멈추었다. 잉크가 종이 위에서 번지지 않았다. 마르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 잉크가 빨리 굳었다. 구일오는 펜촉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이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앞머리 없는 갈색 생머리. 연두색 눈. 왼쪽 쇄골의 작은 점. 입술을 만지는 습관. 비누향. 귤 냄새. 소매 없는 흰 원피스. 슬리퍼 끌리는 소리. 전부 또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져야 하는데, 오히려 선명해졌다. 기억이 무뎌지지 않았다.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사영. 당신이 내 재킷 안감을 수선해준 날, 나는 알았어. 검은 안감에 검은 실. 눈에 안 보이는 바느질. 당신은 내가 모르게 고쳐주려고 한 거잖아. 나는 그걸 알아버렸어. 알아버리고 나서, 그 재킷을 입을 때마다 안감 쪽에 손을 넣었어. 바늘땀을 더듬었어. 당신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나는 당신한테 잘한 게 없어. 등기 이전을 도운 건 내 업무 재량이었고, 귤을 까준 건 당신이 먹는 걸 보고 싶어서였고, 새벽에 데리러 간 건 당신이 혼자 걷는 게 싫어서였어. 전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당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어. 이기적인 거야. 끝까지.


수조 안에서 물이 출렁였다. 토마토가 수면을 쳤다. 먹이를 더 달라는 것이다. 구일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문단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 문단이 끝나면 이 편지는 끝나고, 편지가 끝나면 이사영과의 대화가 끝나고, 대화가 끝나면. 구일오는 그 뒤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펜을 놓을 것 같았다. 놓으면 다시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사영. 사랑해.
이건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쓸게.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구일오 씨

가 아니라 그냥

구일오

라고 부를 때, 나는 그게 좋았어. 당신이 내 얼굴 왼쪽을 볼 때 눈을 피하지 않은 것도. 당신이 물고기한테 이름을 지어준 것도. 당신이 내 입술 위에 손을 얹고 손등에 입을 맞춘 것도. 횡단보도에서 내가 당신 팔을 잡은 것도. 영화관에서 내가 먼저 키스한 것도. 전부. 전부 사랑해.
당신이 귀엽다고 해줬잖아. 매일. 약속대로. 내일부터는 아무도 안 해줘.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거짓말이야. 괜찮지 않아.


구일오는 그 문장을 쓰다가 줄을 그었다. 줄을 긋고 나서 다시 보았다. 검은 잉크 위에 검은 줄. 이사영이 검은 안감에 검은 실로 바느질한 것처럼. 지워도 남는 것. 그는 줄 아래에 다시 썼다.


괜찮아.

한 단어. 두 글자.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해야 했다. 구일오는 만년필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닫지 않았다. 닫으면 진짜 끝이니까. 펜촉이 공기에 노출된 채 마르고 있었다. 잉크가 굳어가고 있었다. 구일오도 굳어가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등뼈가 나무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편지지 위에 마지막 문장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랑해'라고 썼다. '전부 사랑해'라고 썼다. '괜찮아'라고 썼다. 세 개의 문장이 종이 위에서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이사영이 횡단보도에서 자기 팔을 잡았을 때처럼.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잡은 것이 아니라, 잡고 싶어서 잡은 것. 구일오의 문장들도 그랬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쓴 것.


그는 편지를 접었다. 반으로. 한 번 더 반으로. 네모난 종이가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서랍을 열었다. 여섯 통의 편지 위에 일곱 번째를 올렸다. 이사영의 편지 일곱 통은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열네 장의 종이. 두 사람의 목소리. 서랍을 닫았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나무를 밀어내는 둔탁한 마찰음. 그 소리가 이 새벽의 마침표였다.


구일오는 일어섰다. 수조 앞으로 갔다. 먹이통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 끝으로 한 꼬집을 떨어뜨렸다. 토마토가 수면으로 솟구쳤다. 버섯은 느릿느릿 수초 뒤에서 나왔다. 언제나 같은 순서. 토마토가 먼저, 버섯이 나중. 이사영이 이름을 지어준 날, 그녀는 토마토를 가리키며

이 애는 욕심쟁이니까 토마토

라고 했고, 느린 쪽을 보며

이 애는 숨는 걸 좋아하니까 버섯

이라고 했다. 구일오는 그때 웃었다. 지금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멈추었다. 웃음이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밥 먹어.


금붕어에게 말했다. 금붕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물고기는 말을 못 한다. 구일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을 걸었다. 이사영이 이 수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물고기에게 말을 걸던 것처럼.

토마토, 버섯 거 뺏어먹으면 안 돼.

그 목소리가 귓속에 남아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조근조근한. 비누향이 섞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